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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라서 슬픈 날들
의사라서 슬픈 날들
  • 의사신문
  • 승인 2023.02.2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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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80)

언론에 수도 없이 등장했으나 대다수 국민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던 말들로 ‘창조경제’나 ‘혁신 성장’ 같은, 지난 정부의 정치구호들을 들 수가 있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요즘 의료계의 핫이슈 중 하나인 ‘의사과학자’란 하이브리드 용어 역시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의사과학자 양성이 시급하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에게 정작 그 정의를 물어보면 똑 부러진 대답을 듣기가 어렵다. 저마다 조금씩 다른 소리를 하면서 부연 설명이 꽤 길다. 도대체 의사과학자란 무엇일까? 
  
중고등학교 시절 배우던 과학 과목은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등으로 실체가 비교적 명확했다. 오늘날엔 눈부신 IT, BT, NT의 발전에 따라 과학의 경계는 한없이 넓어졌고 여기에 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한 문과 분야에서까지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 같은 용어를 쓰기에 사실상 ‘과학자’란 말 자체부터가 정의하기 만만치 않다. 어쨌든 그 방대한 영역에 발을 들이고 부단히 지식을 쌓아가는 전문가 그룹을 총칭해서 과학자라고 일컬을 것이다. 
  
과학자가 온 학문 분야를 망라하는 거대한 직업군인 데 반하여 ‘의사’는 면허증 덕분에 상대적으로 정의가 분명하다. 어쨌든 요즘 얘기하는 의사과학자가 주로 기초과목 의사를 말하는 것 같다가도, 이른바 연구중심병원의 연구전담의사들 가운데 내과, 외과 등등 임상의사가 즐비한 걸 보면 단지 전공만으로 의사과학자 여부를 말하는 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과학적 소양과 역량을 지니고, 직업상 호기심을 촉발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연구에 매진하는 사람이라면 의사과학자 외에도 치과의사과학자, 수의사과학자, 약사과학자 등등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그런 분들이 의학발전을 견인해 오지 않았는가.
  
의사과학자는 그 명칭이 어떠했건 간에 병원과 의과대학, 연구소 등 의료계 곳곳에서 과거에도 또 지금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의사들이다. 다만 연구와 진료의 비율 등 업무 형태와 기능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그 직군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발전적인 제도 개선이야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이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일부 과학기술특성화 대학에서 의학전문대학원까지 신설하겠다는 논의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2005년부터 정부의 예산 지원과 로스쿨 허가연계 같은 당근과 채찍으로 인해 우후죽순처럼 신설되었다가, 온갖 부작용을 경험한 뒤 사라져버린 기존 의전원의 전철을 다시 밟아서는 안 된다.
  
클래식 음반을 파는 신사동 풍월당의 주인 박종호 선생은 원래 정신과 전문의였다. 다음은 그가 인문학 강의 요청을 받고 어느 의전원을 찾았던 날 생생히 묘사한 강의실 풍경이다.
  
‘공부에 찌들어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사회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생기 없는 표정과 어두운 얼굴들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차라리 숨어서 히히거리거나 몰래 장난이라도 친다면 활기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도 적지 않은 대학원생들이 영혼 없는 존재같이 강의 내내 초점 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가운을 벗은 의사들(2022)>
  
박 대표는 긴 인생 동안 개인의 의식과 사회환경, 그리고 인간관계가 바뀌어 가는데 어찌 의사들은 의사라는 한 가지 직업에만 머물러 있겠느냐고 외친다. 본인이 그랬듯이 과감히 가운을 벗어 던져보라고 슬쩍 유혹하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의전원 학생들의 초췌한 몰골이 특히나 안타까웠을 것 같다. 8년의 수학 기간 동안 의학과 공학을 융합해서 가르치고, 레지던트 같은 임상의사 과정은 아예 없애겠다는, 최근의 새로운 의사과학자 양성용 의전원 계획을 듣는다면 그가 뭐라고 얘기할지 궁금하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식의 의전원 설립 논의가 의료계의 우려나 불안 따위와 별 상관없이 흘러간다는 점이 슬프다.
  
지난주 참석했던 노원구의사회 정기총회 만찬은 분위기가 숙연하다 못해 비장했다. 이른바 ‘간호사법’과 의사면허 결격 사유 확대를 골자로 한 의료법 개정안에 대한 성토가 거셌기 때문이다. 여장부 같은 노원구 의사회장님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두 가지 법의 폐지를 촉구하는 구호를 선창하다 목이 메었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서울시의사회장님은 분노를 토로하며 홀로 테이블의 소주잔을 연거푸 비웠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행사 식순에 따라 스크린에 나타나던 의사윤리 강령의 공허함이 나를 슬프게 했다.
  
“하나, 의사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며... 둘, 의사는 전문가적 양심에 따라 진료를 하며 품위와 명예를 유지한다...”
  
그렇게 진료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이 답답하지만, 정작 나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서울시의사회장님의 넋두리 비슷한 한 마디였다.
  
“제가 4만여 서울시 의사를 대표하는 회장인데, 가끔은 정말로 그런 건지 헷갈립니다. 회비를 내는 의사들은 2만여 명이라 솔직히 그 숫자를 대표한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도 같고...”
  
의료계 주요 현안에 대해 의사들의 정당한 요구가 번번이 무시되는 이유, 전체 의사들이 한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하는 중대한 이유가 이런 문제 아닐까 하는 서글픈 생각을 그 순간부터 떨쳐버릴 수 없었다.
  
지금은 우리 병원에서 가장 실력 있고 성실했던 내과 후배 하나가 마침내 짐을 싸고 있다는 소식이 정말 슬프다. 무려 8년을 끈 의료사고 소송에서 2심 결과가 금고형(집행유예)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외부 병원에서 대장내시경을 하다가 천공이 발생한 환자가 우리 병원에 실려 왔고 후배는 서둘러 그 환자의 천공 부위를 내시경을 이용해 클리핑하려고 했다. 그 와중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심정지. 기도삽관이 쉽사리 되지 않았던 환자는 뇌 손상을 입었고 장기간 입원 끝에 작년에 사망했다. 환자를 살리려 최선을 다했던 후배는 의학적으로 크게 잘못한 것이 없었기에 무죄 판결을 기대하며 법정에서 묵묵히 환자 보호자들의 온갖 욕설을 견뎌 냈었다. 그러나 이미 심신이 피폐해진 그는 아직 최종 판결 전이지만 더 이상의 진료를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내일 마지막 인사 때 부둥켜안고 함께 실컷 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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