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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환자 위로하기
암 환자 위로하기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3.02.14 09:2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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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79)

지금은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에 재직 중인 박희선 교수가 과거 미시간 주립대 교수 시절인 2010년 유방암 환자 200명을 대상으로 수행했던 연구 하나가 당시 국내 언론으로부터 대대적인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갑작스럽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환자는 가족이나 주변 지인들로부터 다양한 위로의 말을 듣게 되는데 그런 메시지 중 가장 도움이 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점수로 구분했다는 연구 결과다.
  
7점 만점에 상위를 차지한 말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당신도 나을 수 있을 거에요(5.93점)”, “힘든 치료과정을 잘 견뎌내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5.76점)” 등이었고, 반대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말들은 “원래 아프고 그런 거니까 당연하게 여기세요(2.94점)”, “괜찮아요? 힘들어 보여요(3.35점)” 등이었다. 신문에 실린 문장이 번역 투였기에 원문을 확인하고 싶어 문헌검색을 해 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어쨌든 자연스럽지 못한 우리말이라 높은 점수 쪽에는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다만 낮은 점수 쪽 말들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는데, 누가 봐도 상투적인 위로임이 드러나기에 그러했다. 또 “절대자를 의지해보세요”라는 말이 4.18점으로 비교적 낮은 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내 관심을 끌었다.
  
작년 여름 나는 급성 전립선염을 진단받고 우리 병원에 입원해서 열흘가량 항생제를 정맥으로 다량 투여했던 적이 있다. 결국은 그렇게 폭발하고 말았지만, 실은 그전에 이미 전립선에 문제가 생길 기미가 보였다. 우연히 혈중 전립선특이항원(PSA) 수치가 전립선암을 의심할 만큼 상당히 올라가 있음을 발견했고 그로 인해 한동안 패닉에 빠졌었기 때문이다. 전립선 조직생검이나 MRI 같이 확진을 위한 검사들을 추가해야 하나 고민할 무렵 극심한 배뇨통이 찾아왔고, 비록 여러 날 병원 신세를 지긴 했어도 증가한 PSA 수치를 그제야 난 가까스로 전립선염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염증 치료 이후 PSA가 뚝 떨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방심할 수 없는 상태지만, 당시의 내 머릿속엔 ‘아아, 올 것이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한 케이블 TV에서 국내 유수의 암센터 원장들을 찾아다니면서 ‘암 전문가인 당신이 만약 암에 걸린다면?’이란 질문을 던지던 게 스멀스멀 기억났다. 당시 국립암센터 원장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올 게 왔구나, 내가 오래 살았구나, 그러겠죠.” 기대수명까지 살 때 남자의 경우 5명 중 2명, 여자는 3명 중 1명이 암에 걸린다는 우리나라 통계를 보면 노인이 암에 걸리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난 기대수명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그때의 경험 이후 나는 부쩍 암 환자들의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책들을 열심히 읽는다. 암을 2인칭이나 3인칭으로 말할 때는 침착하게 온갖 지혜로운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수 있다. 문제는 어느 날 내 몸의 일부가 암세포로 변했다는 사실을 느닷없이 통보받는 순간이다. 우주의 이치에 통달한 도인처럼, 담담하게 암을 1인칭으로 말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그 충격과 공포를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이면 다른 암 환자를 위로할 때도 결코 형식적인 문장을 영혼 없이 늘어놓지는 않으리라. 나는 요즘 수필이건 소설이건 다양한 책을 통해 암과 관련된 여러 사람의 이야기들을 부지런히 모으고 있다.
  
“‘할 수 있다’라고 믿고 긍정적 태도를 유지하면 면역체계가 암을 이겨낼 수 있고 암 생존율도 상승한다는, 미신에 가까운 주장이 마치 과학적으로 검증된 법칙처럼 부과된다. 뒤집어 보면, 만약 호랑이굴에서 살아 나오지 못하는 경우 그 책임은 오로지 긍정적 태도로 상황을 돌파하지 못한 개개인에게 있다는 뜻이다. 철저히 그리고 처절히 각자도생이다.”
  
27세에 직장암 3기 진단을 받은 윤호와 그의 아내가 된 주은이 번갈아 한 챕터씩 써나간 책, <사랑은 패배하지 않는다>(2017)의 한 구절이다. 목사의 아들이었던 윤호는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라거나 혹은 ‘연단하려고 그러시는 것’이라는 주변의 위로에도 반감을 표한다. 암 환자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너무 쉽사리 들먹이는 사람들은 그게 위로가 아니라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심이나 영성이 부족해서 암에 걸리는 게 아니지 않은가. 서두에 언급한 박희선 교수의 연구에서 ‘절대자를 의지해보세요’라는 조언이 낮은 점수를 받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저마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암 환자들에게 두루 효과를 발휘할 마법 같은 위로의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늘 가까이 있으면서 환자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고, 말로 하는 위로가 아닌 실제로 필요한 도움, 예컨대 반찬을 해다 주거나 잠시라도 아이를 돌봐주는 것 등등이 훨씬 낫다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다. 내 생각에는, 그들을 진정 위로하고 싶다면, 몇 마디의 즉흥적인 말보다 차분하게 앉아 정성껏 작성한 편지를 전하는 게 어떨까 싶다.
  
일본 도쿄에 있는 명문 준텐도 의대의 병리과 교수로 은퇴한 ‘히노 오키오’ 선생은 이른바 ‘암 철학 외래’로 유명했던 분이다. 환자를 직접 보지 않는 병리과 의사지만 어쩌다 한 환자로부터 “불안으로 억눌리고 혼란스러울 때, 의사가 평온하게 그 마음을 받아 주고 충고를 해준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란 말을 듣고 암 철학 외래를 개설한다. 한 시간 가량을 무료로 상담하고 나서 발행하는 그의 ‘언어 처방전’에 암 환자들은 저마다 큰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찾으세요. 그러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처방에서 암 환자들은 항암 치료의 고통을 잠시 잊는다. “당신에게는 당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종이를 받아든 환자는 즉각 삶의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 아마도 모두 자상하고 세심한 상담 뒤에 내려지는 처방전이기에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리라. 책에서, 논문에서, 신문 기사에서 내가 요즘 뽑아내는 암 환자들의 생생한 이야기 역시 훗날 이와 비슷한 처방전의 원료로 활용될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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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호 2023-02-14 12:21:25
좋은글 좋은말씀 귀에 걸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