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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탁구회
조기탁구회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3.01.31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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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78)

경기도 안산의 한 병원에서 대장항문외과 봉직의로 일하고 있는 A 선생은 원자력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다. 그 바쁜 인턴 시절부터 틈만 나면 휴식 시간 다 반납하고 원내 탁구 동아리에 얼굴을 내밀던 이 친구는 내가 아는 대한민국 의사 중에 탁구를 가장 잘 치는 사람이다. 그가 마침내 전문의를 따고 몇 년 전 우리 병원을 떠났을 때 난 파트너 겸 코치 역할까지 해주던 동료 탁구인과의 이별이 몹시 아쉬웠다. 그랬기에 최근 걸려 온 그의 전화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A 선생은 탁구 관련해서 작년 말에 책을 한 권 냈다고 했다. 본인의 탁구 실력이 한동안 정체되어 고민하다가 어느 날 문득 라켓 각도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었고 그걸 실전에 적용했더니 순식간에 엄청난 실력 향상이 있었다고 했다. 그 비결을 하루빨리 모든 탁구인들과 나누고 싶어 집필에 몰두했나 보다. A 선생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니까, 당나라에 유학 가다가 동굴에서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한 사발 들이마시고 대오각성했다는 원효대사가 아마 저런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어쨌든 나는 그의 역작을 즉시 전자책으로 내려받았고 단숨에 독파해 버렸다.
  
그의 깨달음은 단순했다. 라켓에 공을 좀 더 두껍게 맞히라는 것. 스핀이 많은 드라이브를 걸겠다고 너무 공 윗부분을 얇게 맞힌 게 그동안 자기 탁구를 너무 어렵게 만들었던 원인이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탁구 동호인들에겐 상식적인 이야기인데, 이걸 책에서 다양한 도해와 실험 데이터 등과 함께 제시하니 제법 강렬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이역만리 타국, 무지몽매한 원주민들에게 본인이 깨달은 진리를 설파하는 선교사의 심정이 느껴졌다고 할까.
  
그날 A 선생과의 즐거웠던 대화는 조금 서글픈 기분으로 끝이 났다. “요즘 탁구 많이 치냐?”는 내 질문에 그는 토요일 새벽, 식구들이 다 잘 때 잠깐 나가서 치고 금방 들어 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맞벌이인 부인과 아직 어린 아이들을 다 놔두고서 자기 혼자만 놀겠다고 주말에 오래 나갔다 올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남편들이 혼자 즐거워하는 걸 괜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인내심과 이해심 박약한 이 땅의 수많은 아내들을, 그 순간 아마 우리 두 사람 다 동시에 떠올렸던 것 같다.
  
탁구 중독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A 선생을 통해 난 주말 새벽마다 모여서 탁구 치는 사람들이 있음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런 모임이 이미 웬만한 동네에는 다 있고 이들을 통칭하여 ‘조기탁구회’라 부르고 있었다. ‘조기축구회’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조기탁구회’라니. 지난 카타르 월드컵 때 우리나라 팀과 맞붙어 졸전을 펼친 우루과이 팀의 공격수 수아레스를 한 외신에서 마치 ‘조기축구회 선수’ 같았다고 비꼰 적이 있는 것처럼, 흔히 실력이 한참 처지는 엉성한 축구팀을 ‘조기축구회’에 비유한다. 그런 식으로 어쩌면 ‘조기탁구회’는 무서운 아내들로 인해 새벽에 몰래 잠깐 탁구 치러 나오는 ‘불쌍한 남편들의 별칭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졸지에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조기탁구회에 한번 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SNS를 통해 우리 집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 정도 떨어진 탁구장에서 근래에 발족한 조기탁구회 모임이 열리는 것을 발견했고 지난 설 연휴 몹시 추운 어느 아침에 기어이 그곳을 찾아갔다. 재미있는 점은 가입과 참가 신청이 모두 SNS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SNS상에서는 본명 대신 모두 별명을 쓴다.
  
아직 냉기가 가득한 이른 아침의 지하 탁구장에 내가 도착했을 때 그 모임의 리더로 생각되는 젊은 남자분이 아주머니 한 분과 연습을 하고 있다가, 안경에 서리가 잔뜩 낀 탓에 앞을 잘 못 보고 비틀비틀 들어서는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빙고 대디’님이시죠? 반갑습니다.” 나는 잠시 뒤를 둘러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내가 우리 집 강아지 빙고 이름을 따서 여기에 <빙고 대디>란 아이디로 신청했었지!’
  
탁구를 좋아하지만, 아내들의 기에 눌려 주눅이 잔뜩 든 남편들의 모임이 아닐까 생각했던 건 완전히 무식한 편견이었다. 내가 찾았던 조기탁구회는 20대에서 40대 정도 나이대의 남녀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활기찬 모임이었다. 나이로는 내가 최연장자인가 싶어 살짝 우울하기도 했지만 서로를 ‘빙고 대디님’, ‘라면 먹는 제이지님’, ‘초롱초롱 네오님’, 이런 식으로 불러가며 모두가 깎듯이 존칭을 쓰는 덕에 금세 내 나이를 잊고 탁구 경기에 몰두할 수 있었다.
  
탁구도 실력 차이가 많이 있으면 승패가 너무나 뻔하기에 흔히 경기할 때 핸디캡을 적용한다. 나는 맨 처음 인사를 나눈 이 모임 리더의 엄격한 경기전 실력 평가에 의해 ‘탁구장 3부’로 분류되었고 그에 따라 나보다 하위 부수들에게는 몇 점씩 점수를 접어주고 경기를 벌였다. 그렇게 하니까 대체로 팽팽한 접전을 벌이면서 모두들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처음 참석해 보았지만 난 조기탁구회에서 젊은이들과 어울리면서 이들 세대가 그토록 중시한다는 ‘공정’의 가치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나이, 성별, 직업 불문하고 모두들 ‘님’으로 동일하게 부르면서 시합은 최대한 승패의 기회가 균등하도록 조절해놓고 오로지 게임을 즐기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니 성적에 따라 주는 상품 같은 건 필요 없고, 경기가 끝나면 일반적인 모임에서 이어지는 사담(私談)이나 뒤풀이 따위도 생략하고 곧장 집으로 간다. 뭔가 쿨(cool)한 느낌 아닌가!
  
작년 연말 우리 병원에서는 직원들끼리 폭언이나 폭행을 방지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노사 간부들이 병원 곳곳을 돌면서 직원들에게 상호 존중하며 서로 꼭 경어를 쓰자고 하소연하는 데도 종종 사고가 터진다. 노동조합에서는 피켓에 “상사가 ‘야’하고 부르면 ‘왜’하고 대답하세요”라는 기발한 문구까지 적어 왔다. 몇 차례 캠페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에 고민스러웠는데 문득 이참에 직원들에게 다들 조기탁구회 한번씩 나가 보시라 권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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