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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5] 의과대학의 학제 개편
[권복규 교수의 의료만필(醫療慢筆) 5] 의과대학의 학제 개편
  • 의사신문
  • 승인 2023.01.1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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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복규 교수(이화의대, 의학교육학교실)

연초가 되니 여러 곳에서 ‘개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드높다. 의학교육 역시 기존의 2+4(의예과 더하기 본과 4년) 시스템을 넘어서서 통합 6년제 의학교육 과정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새로운 커리큘럼을 도입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지고, 조기 임상노출과 실습을 할 수 있으며, 의학연구 관련 프로그램들을 넣어 의사-과학자 양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등이다. 또 외국의 여러 의대 교육프로그램들이 기존의 ‘의예과+본과’ 시스템이 아닌 통합 교육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이러한 주장의 배경이다. 

그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영 찜찜한 것은 결국 실패로 판명된 의학전문대학원 제도의 그림자 때문이다. 이 제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왜 의학전문대학원제도가 되어야 하는지의 이유에 대해 대부분의 의학교육자와 의료계가 흔쾌히 동의할 수 없었고, 졸업생들을 의학전문대학원에 ‘빼앗겨야’ 했던 이공계 학과 교수들도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정부가 의전원 제도를 되돌린 것은 의료계의 반대보다는 이 문제가 더 중요했다. 첨단 산업을 이끌어가야 할 우수 이공계 졸업생들의 대학원 유치에 커다란 공백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정부도 손을 들어버린 것이다.

의전원 제도의 도입 때에도 여러 명분이 있었다. ‘학부에서 다양한 전공을 이수한 학생들이 의료계에 들어와 의학과 자기 전공 학문을 결합할 것이다’, ‘보다 성숙한 의사들을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등이었다. 결국은 각각의 전공을 의학과 접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지나치게 오랜 시간과 비용을 교육에 투자한 의사들이 이를 보상하기 위해 어떤 방향을 취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을 뿐이다. 대체로 문제없는 시스템이라는 것은 없기 마련이지만, 현재의 기본의학교육에 어떤 문제가 있다 해서 제도를 바꿔 이를 해결한다는 것은 그리 현명한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어떤 제도든 제도의 변화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우리 교육환경 및 교육시스템, 그리고 의료환경과 의료시스템을 고려해야 한다. 우선 우리 교육환경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생이라 해서 성숙한 성인이 되기 어렵다. 우리 중등교육 시스템은 청소년들의 사춘기를 유예하면서 무조건 입시를 향해 몰아가며, 그 중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대부분의 의대 신입생은 대학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본인의 자아와 진로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뚜렷한 의사의 직업관이나 소명의식을 가지고 의대를 지원했다기보다는 성적이 우수하니까 의대에 온 이들이 다수이다. 그러므로 대학의 초기 교육은 이들이 초기 청년기의 과제를 완수할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으며, 전문직 교육이자 직업교육인 기본의학교육은 그런 면에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항상 묻는 질문이지만 우리나라 기본의학교육의 목적은 무엇인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졸업생의 거의 대부분이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치지만 인턴 때까지도 자기 책임 하에 진료를 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즉 졸업하자마자 일차진료의사로서 진료를 할 능력은 현행 기본의학교육에서는 거의 길러지지 않는다. 또 현재의 의과대학 실습 형태를 관찰해보면 임상실습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전문가/상급자 감독 하의 진료행위(practice under supervision)’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학생은 대개 교수의 진료 광경을 관찰하는 데 머물러 있다. 현재 대부분 대학병원 임상교수의 업무를 보면 진료가 가장 우선순위고 그 다음이 연구, 그리고 교육은 가장 뒤로 밀린다. 전공의들조차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데 하물며 학생들이야 언급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또한 교육과정을 개선하고 시간을 늘리는 데는 다 비용이 들어간다. 교육, 특히 의학교육은 가장 인력 집약적인 사업이고 좋은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은 모두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한다. 교수에게 한 시간 더 강의하라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대학 등록금은 십 여 년 간 동결 중이고 의과대학마다 사정은 제각기 다르지만 교육에 쓸 충분한 예산을 가진 학교는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니 학제의 개편을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소해줄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각 학교의 특성과 현실에 따라 가능한 곳도,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개혁도 좋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중함과 유연함이다. 어떠한 제도든 장점이 있다면 단점과 한계도 있기 마련이다. 상황에 따라 이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phronesis)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며, 이 실천적 지혜는 의사의 영원한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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