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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환자를 지키며, 인생을 노래하며
암 환자를 지키며, 인생을 노래하며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3.01.10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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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77)

“암 환자를 지켜라!”  

암 환자를 돌보고 치료하는 일이 주된 업무인 우리 병원 의료진들에게 암 환자를 지키라는 요청은 어쩌면 당연한 소리 같기도 하지만, 살짝 초점이 맞지 않는 듯한 느낌도 든다. 가끔 ‘을지훈련’ 같은 걸 할 때 테러리스트들이 차량에 방사능 폭탄(dirty bomb)을 싣고 병원 로비로 돌진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무지막지한 상황을 시나리오로 주는데 그런 종류의 전시 대비 연습이 아니고서야 누가 암 환자를 습격한다고 이들을 ‘지키라’는 걸까.

하지만 실제로 암 환자들은 지난 3년간 테러리스트보다 더욱 교활하고 집요하며 동정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생물인 ‘SARS-CoV-2’, 즉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암 병원 근무자들은 평소 암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일에 더하여 이들을 바이러스 감염으로부터 지키는 일, 이른바 ‘방역(防疫)’에도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입원 환자의 90%가 면역력이 크게 저하된 암 환자인 우리 병원에서 새롭게 부과된 방역 업무는 의료진들을 극도로 긴장시켰다. 어느 한 곳만 뚫려도 병원 전체가 순식간에 초토화될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델타 변이가 막 유행하던 2021년 여름,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코로나 환자들 돌보기 위한 병상이 모자란다면서 공공의료기관인 우리 병원에도 여러 개의 병동을 코로나 전담 병동으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내리겠다면서 현장 실사를 나왔다. 그 얘기는 상당수 암 환자를 억지로 퇴원시킬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국가적 재난에 따른 정부의 요청과 기관의 본래 미션 사이에서 고민하던 우리는 다른 병동과 물리적으로 동떨어진 병동 한 곳만을 코로나 전담 병동으로 전환하겠다는 중재안을 냈고, 말기암 환자들이 갑작스럽게 옮겨갈 병원이 마땅치 않음을 간파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우리의 제안을 마지못해 인정해주었다. 감염을 무엇보다 가장 무서워하던 암 환자들은 자신의 병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코로나 환자들이 여럿 입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처음엔 겁에 질려 술렁거렸지만 이내 우리 의료진들을 믿고 잘 따라 주었다.

아예 병원을 통째로 코로나 전담 병상으로 전환한 여타 공공병원들처럼 엄청난 숫자의 코로나 환자를 진료한 것은 아니었지만, 암 환자를 치료하면서 동시에 코로나 환자를 돌본 우리 병원 의료진들의 희생과 고충은 결코 코로나 전담병원 의료진의 그것 못지않았다. 감염내과 전문의가 부족했던 우리는 혈액종양내과, 소아청소년과, 외과 의사도 코로나 환자 주치의를 맡았고 방사선종양학과와 정신과 전문의도 자원하여 코로나 병동 당직을 섰다, 의사들뿐만 아니라 간호사, 의료기사, 행정직원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한마음으로 위기 극복에 애를 쓴 덕에 우리는 코로나의 공세를 잘 막으면서 암 환자들을 무사히 지켜낼 수 있었다.

역병의 기세가 수그러들던 지난해 말, 우리는 3년여간의 코로나19 대응을 정리한 백서를 발간했다. 코로나와 사투를 벌인 직원들의 노고가 데이터, 사진, 수필 등으로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지만 표지에 제목을 코로나 대신 “암 환자를 지켜라”라고 붙였다. 우리 기관 사명의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한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이 바이러스에 대해 아직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데, 왜 섣불리 코로나19 환자들을 보려고 합니까? 암 환자들이 전염되면 그때는 어떻게 감당하려고요?”  코로나 사태 초기 긴급 소집한 우리 병원 의사들 회의에서 내과 선생 한 사람이 항의조로 이야기했던 내용을 나는 백서 서문에 그대로 기술했다. 당시 누구나 그런 두려움이 있었지만, 우리의 사명인 암 환자 진료와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을 위해서도 오히려 일정 부분 코로나 환자 진료는 피해갈 수 없는 일임을 설득해 간 과정과, ‘막아야 한다, 지켜야 한다’라는 제목의 비장한 동영상 자료를 만들어 직원들을 독려했던 일도 역시 서문에 적었다. 훗날 “암 환자를 지켜라”라는 백서의 제목이 절박하고 치열했던 팬데믹 시기에 우리 직원들의 남다른 각오와 노력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구호로 남게 되리라 믿으면서.

우리 병원은 노원구에 있지만 노원구 말고도 중랑구, 도봉구의사회가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연말엔 일정상 도봉구의사회 송년회에만 참석할 수 있었다. 대개 행사 중에 인근의 협력병원장들에게는 사회자가 마이크를 한 번씩 넘기기에 간단한 인사말을 준비해서 가야 한다. 매번 도봉구의 행사 때는 쌍문동이 고향인 아기공룡 둘리나,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네를 언급하면서 도봉구는 참 포근하고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곳이란 이야기로 서론을 시작했는데 이번엔 “암 환자를 지켜라”라는 우리의 코로나 백서 제목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날의 프로그램을 가만히 보다가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봉구의사회에는 <칸타비타(Cantavita)>라는 이름의 여성 중창단이 있다. 노래를 사랑하는 관내의 여의사 다섯 분이 의기투합하여 2018년 결성한 모임으로 매년 송년 모임 때마다 실력을 뽐내곤 한다. 익히 알고 있던 분들이지만 이번에 그 모임 명칭의 뜻을 처음으로 정확히 알게 됐다. 이태리어로 ‘노래하다’라는 뜻의 ‘cantare’와 ‘생명’ 혹은 ‘삶’을 뜻하는 ‘vita’가 합쳐진 말로 ‘삶(혹은 인생)을 노래하라’라는 의미라고.

“환자를 지켜라”라고 하는 절절하고 비장한 구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유와 품격이 ‘인생을 노래하라’는 권면에서는 물씬 풍긴다. 얼핏 두 개의 명령문이 전혀 다른 상황에서 쓰이는 듯하지만, 인생을 노래하라 외치며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려주는 여의사들 역시 코로나 방역의 최일선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데 최선을 다하시는 분들 아닌가. 당위에 해당하는 의료인의 사명감을 굳이 강렬하게 드러내지 않더라도, 우리 삶이 아름다운 노래가 되기 위해 지키고 보호해야 할 많은 것들이 저절로 마음속에 또렷이 새겨지지 않겠는가.

도봉구의사회 송년회에서 이어진 내 인사말의 메시지는 앞으로 우리 병원에서도 암 환자를 지키면서 아울러 인생을 노래하는 일 역시 빼놓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답사처럼 느껴졌던 칸타비타의 마지막 노래는 들국화의 <걱정말아요, 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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