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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이야기
축구 이야기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12.2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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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76)

군의관 시절의 후반기를 국군포항병원에서 한창 즐겁게 보내고 있을 때다. 인근에 주둔했던 미군 해병대가 걸핏하면 축구 시합을 하자고 우리가 속한 의무부대에 도전해 왔다. 결국 군의관 포함, 뛸 수 있는 병사라면 환자들까지 죄다 차출하여 국가 간 자존심을 건 경기 한판을 종종 벌이곤 했는데 문제는 양 팀 모두 출전 선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축구공을 동시에 3개 혹은 4개를 사용하는 소위 ‘떼(crowd) 축구’를 해야만 했다.
  
‘떼 축구’는 아무 공이나 그저 가까이 있는 쪽으로 무리가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어떻게든 그걸 상대방 골대에 차 넣으면 되는 것으로, 작전도 필요 없고 심판도 필요 없다. 눈앞에 있는 공 하나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다른 공이 날아오면 별안간 진로를 바꾸게 되니 진행이 매우 산만했고, 아무래도 팀워크보다는 개인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런 무식하고 몰상식한 방식의 축구가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거나 뜨거웠던 지난 카타르 월드컵의 열기가 채 식지 않았다는 핑계 아래, 축구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뭇 여성들이 그토록 싫어한다는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로 과감히 서론을 시작한 것도, 짜릿했던 대한민국 16강 진출 드라마가 아직은 우리 국민들의 혈중 ‘행복 호르몬’ 수치를 유지하게 해주고 있으리란 믿음에서였다. 아직은 여전히 온 국민이 지난 월드컵 축구에서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떠오른 ‘영감(靈感)’을 서로 나눠볼 만한 시간 아닌가.
  
올해 85세 되신 우리 어머니는 여기저기 근골격계 통증을 호소하시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밤잠을 잘 못 이루시는 것이다. 쉽사리 잠들지도 못하시고 평소 수면의 질도 나쁘신 분이 우리 시간으로 자정에 시작한 한국과 포르투갈의 16강전 마지막 경기를 끝까지 다 보셨다는 얘길 듣고서 나는 어머니께 화를 냈다. 축구도 별로 안 좋아하시는 분이 건강을 먼저 생각하셔야지 밤샘 축구 관전이 웬말이냐고. 
  
아들의 역정에도 아랑곳없이 어머니는 그 경기를 보면서 내내 한국이 이기게 해달라 기도를 올렸다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이 그런 기도는 절대 안 들어주신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는데 가만 듣다 보니 어머니의 기도에는 단순히 스포츠에서의 승리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었다. 대한민국이 경제도 힘들고 사회도 분열되어 온 국민이 한숨만 내쉬고 있는 요즘, 축구라도 한번 이기면 사람들 기분이 좋아져서 서로 미워하는 것도 덜 하고 우리나라에 활력이 돌지 않겠냐는 뜻으로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다는 것이다. 공평하신 하나님이지만 왠지 노인네의 그런 간구는 좀 참고를 하셨을 것 같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이번 월드컵 축구를 통해 ‘빌드업(build-up) 축구’란 말을 처음 알게 됐다. 뭔가를 차곡차곡 쌓는다는 원래의 뜻처럼 축구에서도 같은 편끼리 패스를 짜임새 있게 주고받으며 상대방 진영으로 차근차근 전개해 들어가는 전략을 의미한다. 과거에 한두 명의 걸출한 스타 선수가 있어서 무조건 그쪽을 향해 뻥뻥 차주는 이른바 ‘뻥축구’와 비교되는 용어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빌드업 축구’와 가장 반대편 스펙트럼에 위치한 개념은 내가 군대에서 이따금 했던 ‘떼 축구’가 아닐까 싶다.
  
소수 정예에만 지나치게 의존하여 모든 일이 그쪽으로 몰리는 ‘뻥축구’ 같은 시스템도 곤란하지만 목표의 우선순위도 없이 그저 눈앞에 보이는 일에만 호들갑스럽게 몰려다니며 실속도 차리지 못하는 ‘떼 축구’ 시스템도 조직을 망치기는 매한가지란 소리를 난 월드컵 기간 중 여기저기 모임에서 하고 다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량을 갖춘 개개인이 최대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전체가 한 방향으로 효율적으로 차근차근 전진하는 ‘빌드업 축구’가 아니겠느냐는 말과 함께.
  
그러던 중에 코로나 사태 이후 모처럼 만에 강당에서 병원 ‘QI(질향상) 경진대회’가 열렸다. 검진센터에서는 내시경 장비 세척을 위한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안전성과 진료 효율성을 높일 방법을 발표했고 호스피스팀에서는 섬망 증세가 동반된 말기 암 환자 간호용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소개했다. 장비팀에서는 수액 주입기처럼 배터리가 내장된 장비들의 배터리 교체 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을 고안했고 혈액종양내과에서는 각 과마다 제각각인 항암치료 프로토콜을 표준화하는 시스템을 단계적으로 적용하고자 하였다. 나는 이들에게서 화려하진 않지만 믿음직한 ‘빌드업 축구’의 전형을 볼 수 있었기에 몹시 뿌듯하였다.
  
지난주 우리나라 신의료기술 도입을 주관하는 ‘한국보건의료연구원’에서 워크숍이 있어 참석했다. 그곳 원장님께서 인사 말씀 중에 불쑥 축구 이야기를 꺼내셨다. 이번 월드컵에서 당신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오프사이드 반칙을 칼같이 가려내는 인공지능(AI) 심판 시스템이었다는 것이다. 늘 판정시비에 오르내리던 오프사이드가 이번에는 인공지능이 확실한 근거로 맞다 아니다를 판별해주니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의료계 신기술 평가의 심판 역할을 하는 ‘한국보건의료연구원’도 더욱 과학적 근거 중심의 방법론을 개발해 나가겠노라 역설하셨다. 국민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면서도 이따금 지나친 규제 아니냐고 오해를 받는 기관의 책임자로서 느끼는 고충과 다짐을 축구 이야기로 절묘하게 풀어내셨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확고히 자리 잡은 축구는 단순히 보고 즐기는 운동 이상의 영감을 준다. 우리 어머니는 축구를 통해 우리나라가 한결 밝아질 수 있음을 간파하셨고, 보건의료연구원 원장님은 근거중심의학의 기반이 강화되어야 함을, 나는 팀워크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다. 여기에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축구에서 배웠다”라고 말한 알베르 까뮈의 말까지 보탠다면 시도 때도 없이 축구 이야기 떠드는 자들에 대해 여성들이 조금은 더 관대해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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