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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소리
죽비소리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12.13 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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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75)

미국 워싱턴주에 위치한 ‘벨뷰(Bellevue)’는 주(州) 최대 도시인 시애틀과 호수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인구 15만 남짓의 위성도시다. 이곳에서 지난여름 해외토픽을 장식한 강도 사건이 있었다. 루이뷔통 매장에 복면을 쓰고 침입한 17세 소년이 우리 돈으로 약 2천5백만 원 상당의 명품 가방을 훔쳤다. 범행 후 급히 달아나던 그는 통유리로 된 매장의 창문을 아무것도 없이 열려있는 출구로 오인하여 그만 그대로 들이받고 말았다. 어찌나 세게 박았던지 범인은 그 자리에서 실신했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그를 손쉽게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루이뷔통 매장의 CCTV에 고스란히 녹화된 이 영상은 인터넷상에 삽시간에 퍼졌고 누리꾼들은 “저거 바보 아니냐”, “죄짓다가 바로 벌 받았네”, “통쾌하고 웃기다”라는 식의 조롱 섞인 반응을 쏟아냈다. 얼마 전 여동생을 통해 뒤늦게 이 뉴스를 접하게 된 나는 사람들의 그런 조롱에 차마 동조할 수가 없었다. 불과 몇 주 전에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휴가를 잠깐 내고 주말을 붙여서 딸아이가 교환학생으로 가 있는 싱가포르에 잠시 가족여행을 갔을 때 벌어진 일이다. 마리나 베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텔에서 오랜만에 완전체로 재회한 가족들이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산책 삼아 정원과 풀장을 예쁘게 꾸며 놓은 1층을 둘러보러 가는 길이었다. 그랜드 피아노와 커다란 그림이 놓인 우아한 홀을 지나 실외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내 귀에 갑자기 ‘쾅’하는 굉음이 들렸고 곧이어 빠개질 듯한 머리 통증이 밀려왔다. 아, 투명한 유리문이 있는 걸 모르고 그걸 내 안면으로 들이받은 것이다.
  
아마 비슷한 일을 당해본 사람들은 알리라. 이럴 때 통증보다 더 크게 밀려오는 게 바로 수치심이란 것을. 나는 기절할 것 같았지만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비척비척 일단 그랜드 피아노까지 있는 힘을 다해 걸어간 뒤 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눈에 부디 고뇌하는 예술가 정도로 비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거기서 오래도록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눈두덩에서 찔끔 흐르는 핏방울로 인해 뭔가 바보짓 했다는 걸 남들이 모를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창피하고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 뜻밖에도 내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투명방음벽에 부딪혀 쓰러지는 새들의 심정이 마구 느껴지면서 허망하게 죽어간 조류에 대하여 측은지심이 발동했고, 낯선 환경에서의 과도한 호기심과 덤벙거림이 사람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겠다는 교훈을 얻었으며, 탁구칠 때를 제외하고 앞으로는 절대로 초속 2미터 이상의 무리한 동작을 하지않으리라는 현실적인 액션 플랜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신적 깨달음은 물리적 충격을 동반할 때 그 효과가 배가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케팅 용어로 ‘아하 모멘트(Aha moment)’라는 게 있다. 어떤 제품을 사용하던 소비자가 처음으로 그 제품의 가치를 깨닫고 ‘아하!’하는 감탄사를 발하는 순간을 말한다. 코로나 사태 직후 온라인 회의가 활성화되기 시작할 무렵 ‘줌(Zoom)’이란 애플리케이션을 처음 써 본 사람들이 그 성능에 놀라 ‘아하’하고 감탄했다는 게 흔히 드는 사례다. ‘아하’는 이처럼 일상에서의 소소한 깨달음을 나타내는 감탄사로서 국제적으로 널리 애용된다.
  
‘아하’만큼 일상적으로 쓰이는 단어는 아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강렬한 깨달음이 있었을 때 등장한 역사적인 감탄사가 ‘유레카(eureka)’다. “나는 찾았다(I have found it)”란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로서,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하다가 이렇게 소리 지르며 스트리킹(streaking)을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왕관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일부라도 은 따위의 이물질이 포함되었는지 알아내라는 왕의 명령에 고심하던 아르키메데스가 어느 날 목욕탕에 몸을 담글 때 넘치는 물을 보고 같은 무게라도 부피가 다르면 넘쳐나는 물의 양도 다르다는 걸 별안간 깨달았다는 얘긴데, 그게 벌거벗고 온 동네를 뛰어다닐 만큼 어마어마한 발견이었을까, 그전에 목욕할 때는 왜 몰랐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깨달음과 관련하여 ‘아하’는 강도가 좀 약한 것 같고 ‘유레카’는 그 전설의 진위 여부가 다소 의심스럽던 차에 내 관심을 끈 것은 ‘죽비소리’였다. ‘죽비(竹篦)’는 불교에서 참선을 시작하거나 끝낼 때 신호를 보내는 용도, 혹은 졸거나 한눈파는 수행자가 있을 때 등짝이나 어깨를 내리침으로써 주의를 환기하는 용도로 쓰는 대나무 막대기다. 이미 물리적 충격으로 인해 강화되는 정신적 깨달음을 아프게 체험한 나는 ‘아하’나 ‘유레카’ 이상의 깨달음을 촉진하는 데에 죽비소리가 왠지 꽤 도움이 될 것만 같았다. 곧 인터넷몰에서 하나를 구입했는데 어이없게도 거기서 죽비는 ‘마사지 도구’로 분류되고 있었다.
  
한문학자인 한양대의 정민 교수가 고려와 조선 시대 대학자들의 명문장 중에 자신에게 큰 울림을 주었던 글 120편을 뽑아 오래전에 <죽비소리>라는 에세이를 펴냈다. 요즘 나는 틈틈이 이 책을 읽고 뜻을 새기면서 죽비로 내 등짝을 한 번씩 아프게 때린다. 한문에 정통한 정교수는 원서에 실린 문장 자체가 생생한 죽비소리로 다가왔겠지만 나는 우리말 풀이를 보면서도 깨달음이 모자라 죽비를 휘둘러 댄다. 그러다 문득 ‘딱’하는 죽비소리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는 스승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정교수의 책 가운데 오늘 읽은 부분에서는 퇴계 이황에게 보낸 남명 조식의 편지가 소개되고 있었다. 조식은 학문적 라이벌이었던 퇴계 선생에게 ‘입으로 하늘의 이치를 말하지만 제 방 청소 하나 할 줄 모르고 헛된 명성만 추구하다가 남들까지 위험하게 하는 당신 제자들’을 탓하면서 부디 교육 잘 시키라고 나무란다. 내게 스승이 없음을 아쉬워할 게 아니라 이제는 마땅히 내가 올바른 스승이 되어야 함을 서늘하게 깨닫게 해주는 죽비소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병원을 거쳐 가는 전공의들, 전문의 후배들, 그리고 직원들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해 돌보고 선한 영향을 끼치며 그들에게 좋은 본이 되자 다짐하면서 죽비로 다시 한번 등을 두드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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