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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경우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경우
  • 전성훈 변호사
  • 승인 2022.12.06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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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58)

‘우뜨로(Outreau)’라는 지명을 프랑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동시에 프랑스 법조인들은 이를 들으면 표정이 굳어진다. 도버 해협을 두고 영국과 마주 보고 있는, 프랑스 북부의 소도시가 왜 이런 유명세와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2001년 시작되어 2005년 끝난 ‘우뜨로 사건’ 때문이다.

파브리스 뷔르고는 국립사법관학교를 수료하고 2000년 수사판사로 첫 발령을 받았다. 뷔르고는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우뜨로에서 다수의 아동성폭력 사건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29세의 젊은 법조인은 수사에 착수했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열정적으로 수사를 지휘했다. 그리고 무려 18명의 성인 남성 피의자를 구속했다.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믿은 프랑스 국민들의 환호는 더욱 커졌지만, 인구 만 명 남짓한 촌구석 소도시는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정의’가, 아동피해자들의 부정확한 진술의 신빙성과 객관성을 따져보지 않고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여서 구현된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동피해자가 누군가를 지목하면, 보강증거가 없거나 부실해도 구속했다. 무죄추정원칙과 증거재판주의 등 형사소송법의 대원칙들은 휴지통에 처박혔다. ‘아동성폭력 사건’이기 때문이었을까? 야심 넘치는 법조인의 머리는 뜨거워졌고, 본분을 망각한 법조인 덕분에 국민들의 머리는 더 뜨거워졌다.

1심에서 진짜 범인 4명은 자백했지만, 나머지 14명은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고, 그때는 이미 짧게는 1년부터 길게는 3년까지 미결구금을 당한 뒤였다. 심지어 그중 1명은 풀려나지 못했다. 그는 재판을 앞두고 구치소에서 자살했기 때문이다.

14명의 무고한 이들이 겪었던 억울함, 구금 중 다른 재소자들로부터 아동성폭행범이라는 이유로 받았던 성폭력과 폭행과 괴롭힘, 그리고 아동성폭행범으로 낙인찍혀 가족과 지인들로부터 버림받고 평생 감시받다가 죽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보상금을 얼마 받았다고 위로가 되었을까? 

이 사건으로 프랑스 사회는 들끓었다. 결심재판에 파리고검장이 출석하여 사과했고, 시라크 대통령이 철저한 진상조사와 관련 개혁을 지시했다. 프랑스 의회도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조사에 나섰고, 프랑스 법무부도 대대적인 감찰을 진행하고 보고서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프랑스 국민들이 잘 기능하고 있다고 믿었던 사법체계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프랑스 정부와 의회는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대대적으로 사법 제도를 개혁했다. 그리고 점점 심해지고 있는 아동성범죄에 대한 과도한 정치권의 관여와 여론의 압력으로부터 형사소송원칙을 지키기 위해, 아동 진술의 신빙성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우뜨로 사건은 직업윤리를 망각한 법조인의 과욕과, 수사기관이 의도를 가지고 흘려준 내용을 중계방송하는 저급한 언론의 생리와, 손쉬운 정의 구현을 기대하는 국민들의 안이함이 뭉쳐 만들어진 사고였고, 프랑스 법조계의 탄식 그대로 ‘사법의 대재앙’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실패에서 배움으로써 사법개혁을 이뤄냈다. 완전한 제도라는 것은 없겠지만, 적어도 제도의 실패에서 배우려는 의지가 있어야 제도 자체가 지속 가능함을, 우뜨로 사건은 보여주었다.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 항소심은, S한방병원에서 이른바 ‘산삼약침’을 맞고 피해를 입은 환자 가족들이 한의사와 사무장을 사기죄, 무면허의료행위 등으로 고소한 사건에 대해, 1심보다 더 무거운 실형을 선고하면서 이들을 법정구속했다.

이들은 과장된 인터넷 홈페이지 광고를 보고 방문한 환자들에게 ‘S한방병원 면역치료는 암세포만 죽이고 면역세포는 활성화시키는 표적 항암치료이다’, ‘치료 후 67% 환자가 암 진행과 전이가 멈췄다’, ‘암은 차갑고 습한 것을 좋아하는데 산삼약침이 열성이기 때문에 암을 말려서 죽인다’고 거짓말하여 피해자들로부터 수천만 원의 시술료 및 처치료를 받았다.

1심 재판부는 ‘정맥주사는 한의사의 면허범위 내 의료행위로 보기 어렵고, 한의학적 침술 행위로 볼 수 없으므로, 의료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한의사의 산삼약침 관련 행위는 무면허의료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즉 정맥주사와 동일한 이른바 ‘약침’이 한의사의 면허범위를 벗어나는 행위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의학계는 똑같은 내용으로 한방의 ‘약침’ 행위가 명백한 의료법위반임을 지적해 왔지만,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10년 전부터 피해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해 왔고, 이들이 사법부에 피해를 호소하자 이제서야 사법부의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정부는 ‘이것은 산삼약침에 국한된 판단일 뿐’이라고 축소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의사가 정맥주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모든 문제의 발생 근원이고, 주사하는 것이 산삼약침이건 무엇이건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만약 한의사가 검증된 의약품인 프로포폴을 ‘약침’으로 주사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가?  프랑스 국민들은 우뜨로 사건을 겪으면서 14명의 무고한 구금과 1명의 소중한 생명을 대가로 치뤘지만, 이를 통해 사법개혁을 이뤄냈다. 반면 의료의 발전으로 확대된 의료행위들에 대한 의료법상 면허 범위에 따른 명확한 기준 수립과 제도화가 필수적이었음에도, 우리 정부는 수십 년간 이를 방치했고, 결국 이와 관련된 분쟁들은 현재 법원과 수사기관의 손에 맡겨지고 있다. 의료법상 면허 범위에 관한 현행 제도는 사실상 기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따라서 적어도 이 부분은 실패한 제도이다. 하지만 정부는 제도의 실패에서 배우지 못했고, 더욱이 배우려는 의지조차 없어 보인다.

위 항소심 판결과 함께 피고인들이 법정구속되었으므로, 대법원은 몇 달 안에 최종적 판단을 내릴 것이다. 정부가 지금이라도 한방의 ‘약침’ 행위가 의료법에 위반된 것임을 명확히 하고, 더 나아가 의료법상 면허 범위에 따른 의학/한방 의료행위를 명확히 구분하는 제도 개선에 착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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