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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컬레이터에 대한 단상(斷想)
에스컬레이터에 대한 단상(斷想)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11.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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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74)

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가고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간사람은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마치 유명 힙합 가수가 속사포처럼 내뱉는 랩을 연상시키는 이 구절은 일제강점기의 시인 이상(李箱)의 <건축무한육면각체>란 작품에 등장한다. 어느 가을, 시인이 동경의 미츠코시 백화점(종로의 화신백화점이란 설도 있다)에 들렀다가 내부의 최첨단 시설에 깜짝 놀라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중에 위에서 인용한 부분은 시인이 백화점 한복판에 놓인 에스컬레이터를 보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대로를 읊은 것이다. 13인의 ‘아해’가 정신없이 질주하는 <오감도>에 비하면 오늘날 누구나 친숙한 백화점 안의 정경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이 시는 그나마 해석하기 쉬운 축에 속한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연대 앞 신촌 주택가에는 함께 놀던 동무들이 많았다. 다 고만고만한 또래들이었지만 개중에는 목소리 크고 입담이 좋아 일찌감치 어른 흉내를 내는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그 녀석이 명동에 새로 생겼다는 ‘코스모스 백화점’에 다녀왔다면서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상에겐 시상(詩想)을 자극할 만큼 경이로웠던 에스컬레이터의 첫인상이, 내게는 동네 친구의 허풍 가득한 설명으로 인해 느닷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세상에, 거기 갔더니 움직이는 계단이 있더라. 근데 그게 잘못하면 다리가 쭉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마지막엔 반드시 폴짝 뛰어야 해.”
  
어린 시절 뇌리에 박힌 이 ‘무서운’ 에스컬레이터의 이미지는 이후로 꽤 오래 갔다. 물론 발이 빨려 들어간다는 소리는 백화점에 가보고 금세 과장이란 걸 알아차렸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폴짝 뛰기’는 오래도록 나의 습관이 되었다. 어느 백화점이나 매장 한가운데 배치해놓고 느릿느릿 움직이게 하는 에스컬레이터에는 시각 자극을 통해 상품 구매를 촉진하려는 마케팅 전략이 숨어있다고 한다. 성인이 된 내가 거기에 도통 넘어가지 않았던 까닭은 순전히 어린 시절의 공포심이 안전의식으로 이어져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주변에 눈 돌릴 여유 없이 오로지 움직이는 계단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기관을 소개하는 자리가 있을 때마다 나는 병원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에스컬레이터 이야기를 종종 하곤 한다. 광화문에서 현재 노원구의 위치로 이사했을 때가 1984년이었고 그때 신축된 원자력병원 본관 건물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이었다. 1층과 2층 사이에 에스컬레이터가 놓인 국내 첫 번째 종합병원이었다니 말이다. 신축이전 기념식에 대통령 영부인이 참석하여 테이프 컷팅을 할 만큼 세련되고 자랑스러운 에스컬레이터였던 셈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에스컬레이터도 덩달아 나이를 먹어 간혹 작동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환자 안전을 고려할 때 운행속도를 더 늦춰야 하는 게 시급한 문제로 대두됐다. 워낙 구형 모델이기에 전산시스템으로 속도가 조절되는 게 아니라 아예 하드웨어를 교체해야 하는 형편이어서 개선에 적잖은 돈이 들었다. 움직임이 느려졌으니 아무래도 안전사고는 덜 나겠지만 사실 에스컬레이터에서의 사고는 기계의 속도보다는 거기에 올라탄 사람들의 움직임이 주된 발생 원인이다.
  
언젠가 나를 찾아 우리 병원에 온 옛 친구 하나도 그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져 크게 다칠 뻔했다. 나는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고 있었고 그 친구는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고 있다가 중간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큰 소리로 반가움을 표시하던 친구는 갑자기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방향을 180도 바꿔 나를 따라 1층 쪽으로 역주행을 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이내 넘어지고 말았다. 하마터면 친구 만나러 병원에 왔다가 곧장 입원할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사람이 움직이다 발생하는 사고는 국가도 책임이 있다.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아직도 오른쪽으로 한줄서기를 하는 모습을 흔히 본다. 관련 법령에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걷거나 뛰는 것이 불법임을 엄연히 명시해 놓고서도 무슨 생각인지 한동안 정부가 앞장서 한줄서기 캠페인을 벌이지 않았었나. 그러다 슬그머니 두줄서기 운동을 잠시 하더니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닌 방치상태다. 도대체 어떤 게 안전을 위해 바른 이용법인지 대다수 국민들은 헷갈릴 뿐이다. 어쨌든 현행법상 순방향으로 걷거나 뛰는 것도 안 되는데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건 엄청나게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에스컬레이터는 이미 적당한 우리말이 따로 없는 외래어가 되어 버렸지만, 북한에서는 ‘계단승강기’라는 말을 쓴다고 한다. ‘에스컬레이터’란 의미 자체는 ‘올라가는 기계’만을 뜻하기에 오르고 내리고를 다 표현한 ‘승강(乘降)’이란 말이 더 정확하다. 그렇게 명칭부터 우선 분명히 해두어야 짧은 시간이지만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잠시 인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 삶에 올라가는 시간이 있으면 내려가는 시간도 있다. 굳이 이름에서 내려가는 쪽을 빼버리고 ‘오름 계단’이라 아무리 우겨도, 실제로는 인생길에서 내려가는 계단을 안 만날 수 없다. 어느 쪽이건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면 안전사고가 날 위험이 있거니와 특히 위험한 것은 올라가는 시간에 억지로 내려가려 하고, 내려가는 시간에 기를 쓰고 올라가려 할 때다. 흐름은 순리에 맡기고 주변을 여유롭게 두루 둘러본다면 백화점 쇼핑처럼 또 다른 즐거움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도 여전히 뭔가 불안하고 조급해지고 괜히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리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작가 김훈의 글 한 토막을 소개한다. 자전거를 타고 전국 산하를 누비며 쓴 <자전거 여행> 서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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