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0:55 (금)
[기획-코로나로 쓰러져간 의사들] "아버지·삼촌·형님 같았던 선생님"···동네주민들이 기억하는 故人
[기획-코로나로 쓰러져간 의사들] "아버지·삼촌·형님 같았던 선생님"···동네주민들이 기억하는 故人
  • 조준경 기자
  • 승인 2022.12.01 08: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든 앞둔 고령의 나이에도 코로나19 팬데믹에 환자 위해 출근
"진료 마지막날까지 즐겁게 일하셔···동네 분들이 참 좋아하셨어"
임현선 회장 "의료기관에 규제·교육 지침만 내리지 말고 소통해야"
황찬호 회장 "위험 무릅쓰는 의료기관 특별수가지원 유지돼야 해"

지난 2019년 11월 중국 우한시에서 최초로 발생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하면서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이후 코로나19가 전국을 휩쓸고 있을 무렵에도 우리사회의 의사들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진료실을 지켰다.

그 결과 백신 접종률이 높아져 최근 국내에서도 7차 대유행이 본격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위중증으로의 진행률은 크게 완화돼 지난 2년여간 크게 위축됐던 일상은 회복됐고 현재 거리엔 다시 활기가 넘치고 월드컵의 열기에 흥겨운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처럼 코로나19의 유행이 잦아들기 까지 ‘사투’나 다름없이 진료를 한 의료진들이 있었고 일부는 진료를 하다 도리어 감염 환자가 돼 사망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의사가 사망한 것은 지난 2020년 4월 3일 경북 경산시에서 내과 개인의원을 운영하던 59세 고(故) 허영구 원장이 첫 사례로 이후 많은 의사들이 코로나19의 폭발적인 대유행 상황 속에서도 진료에 헌신하다 세상을 떠났다.

코로나19로 인해 병의원 방문이 대폭 줄어 개원가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특히 이비인후과는 1인당 매출이 무려 –37.5% 감소하는 위기를 겪었고 아직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 25개 진료과 중 소아청소년과와 함께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 중이다.

이런 위기 상황에 최일선의 진료 현장에서 코로나19 환자를 진료하다가 도리어 본인이 감염돼 사망한 의사들과 그 유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대한개원의협의회가 지난 2월 16일 중앙방역대책본부 정보분석팀으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당시 코로나19 감염 의료진 중 사망자는 총 15명이었다. 이후 3월에도 서울시의사회 소속 회원 중에서 팔순을 2년여 남겨두고도 마지막까지 환자를 돌보다 운명을 달리한 의사가 있었다. 한바탕 위기가 지나가고 조금씩 일상이 회복되는 지금 그들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아버님이 이 곳에서 병원을 운영하신 지 30년이 넘으셨습니다. 코로나 한창이던 지난 3월, 주말인 토요일에도 쉬지 않고 진료를 하셨어요”

서울 송파구 P내과의원의 백모 원장은 올해 고인이 된 아버지를 기억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운영하던 조그마한 동네 내과의원에서 고인은 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출근해 젊은 시절처럼 정력적으로 환자 진료를 봤다고 한다.

P내과의원은 코로나 전담의료기관은 아니었지만 3월은 코로나 환자가 전국적으로 급증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감기 환자들이 무수히 몰려들었는데 사실상 거의 다 코로나 환자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고인은 지난 3월12일까지 동네 주민들이 대부분인 단골 환자들을 진료했다.

백 원장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마지막까지 즐겁게 환자들을 대했다. 그렇게 주말 진료까지 마치고 일요일 식사까지 맛있게 잡수셨던 아버지가 월요일 새벽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열도 나지 않았기에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심정지가 온 상태에서 119를 타고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에야 코로나 양성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정지가 곧 회복돼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을 때만 해도 곧 회복되리란 희망이 있었다. 고령의 나이에도 마라톤을 취미로 즐길 정도로 건강 관리에 열심이었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일주일 간 입원해 계시다가 일요일날 많이 회복돼 다음날 잘하면 일반병실로 가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월요일 새벽에 갑자기 돌아가시게 됐습니다. 코로나 확진을 받으시고 일주일 만에 운명하신 거지요”

백 원장은 코로나19가 유행을 할 무렵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가 돼 병원에 나오지 말시라고 간곡히 요청했지만 아버지는 “너 바쁘잖아. 내가 도와줄께”라며 기어코 출근을 했다. 집과 병원 외에는 달리 가는 곳도 없었기에 코로나는 병원에서 걸린 것이다. 백 원장은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 아버지를 모시고 하와이로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날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다가 갑작스런 아버지의 운명에 허탈했다고.

“코로나 이전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족끼리 동유럽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때 정말 많이 좋아하셔서 다시 모시고 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코로나만 아니었으면”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또 고인이 병원이 바빠서 아들을 도와주려다가 그렇게 되셨다는 생각에 죄책감마저 든다고 했다.

아버지의 운명에 백 원장은 자기 탓을 할 뿐이었다. 전염병은 물론 몰려드는 환자들도 의사로서 늘 마주해야하는 일이기에 다른 원망이 대상이 있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1984년부터 송파구 모처를 40년 가까이 지켰다. 그 때문에 환자들도 모두 동네 주민들이고 친숙하게 알고 지냈다.

“동네 분들이 오면 아버님을 참 좋아하셨어요. 어떤 분은 아버지 같았다고 얘기하고, 어떤 분은 친한 동네 형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걸 알게 됐을 때 많은 환자분들이 오셔서 엄청나게 울고 가셨습니다”

환자들은 병원에 오면 10년 정도 본 백 원장보다는 40년을 함께 한 아버지를 더 찾았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방금 김장이 끝난 겉절이를 가져와서 놓고 가기도 하고, 떡을 가지고 와서 주고 가기도 했다. 아파서 찾는 의사 선생이 아니라 일생의 건강을 함께 지켜봐 온 가족을 대하듯이 기억한 것이다.

고인 백 원장이 타계하고 일곱달여가 흐른 후에도 병원은 여전히 많은 환자들로 붐볐다. 진료를 마치고 돌아가는 환자들은 고인에 대해 너나할 것 없이 좋은 분이었다고 말했다.

“이 동네에 21년을 살았습니다. 원장님은 동네 아저씨 같은 분이었어요. 항상 편하게 올 수 있게 해주셨어요. 너무 좋으셨는데”

“처음 뵀을 때 애기들한테 사탕도 쥐어주면서, 얼러가며 진료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았었어요. 아버지 같은 분이셨어요”

“그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위험한데 병원에 나오셔서 그렇게 마지막까지 진료해주시고, 돌아가셨단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백 원장을 비롯한 코로나19로 인해 숨진 많은 의사들은 국민의 건강을 위해 의사로서의 직업적 소명을 다하였다. 고령의 나이에도 자신이 자리에 없으면 고통을 겪을 다른 이들을 먼저 생각한 참 의료인들이었다. 환자들은 그러한 이들을 단지 의사라는 직업인이 아닌 아버지, 삼촌, 형님과 같은 가족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코로나19 대응에 대한 의사들의 헌신에 대해 임현선 송파구의사회장은 “감염병 최일선에서 환자들을 직접 진료하고, 치료제를 처방하는 사람들은 의사들과 일차의료기관인데, 의사들의 노력이 도외시되는 것이 무척 아쉽다”라며 “현재 의사들은 소외되고 고생을 많이 했지만, 우리는 이걸 천직으로 생각하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임 회장은 “위험에 노출돼 있지만 사명감 하나로 버티고 있는 것”이라며 “정부가 위급할 때만 도움을 요청하며, 의료기관에는 여러 규제와 교육만을 코로나19 대책이라며 치중하고 있는데, 앞으론 의료기관의 입장을 듣고 함께 소통하며 힘을 합쳐나가는 모습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황찬호 대한이비인후과의사회 회장은 “이비인후과는 특히나 감염에 취약하며, 코로나 환자들이 있으면 기존 환자들이 병원에 잘 안온다”라며 “코로나와 관련된 특별수가를 내년 1월까지 연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도 환자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러한 수가를 유지해 줘야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이 힘들긴 하지만 나라가 어려우면 우리라도 도와야지 별 수 있나”라고 덧붙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