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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약(補藥)에 대하여
보약(補藥)에 대하여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9.2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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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70)

‘약식동원(藥食同源)’이란 한자 성어를 처음 본 곳은 우리 동네 설렁탕집이었다. 가마솥에 사골, 우족, 도가니 등을 넣고 24시간 넘게 푹 고아서 진정으로 깊은 맛의 국물을 우려낸다는 설명이 그 한자어 뒤에 이어지는 걸 보면 아마 한 끼 식사를 잘 챙겨 먹는 게 건강에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는 의미 같았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까 ‘약과 음식은 그 근본이 동일하다’라는 이 약식동원 사상은, 특별한 출처가 있는 게 아니라 대대로 우리 한식에 깃든 철학이라고 나와 있었다. 음양오행 같은 몸의 조화가 깨질 때 병이 된다는 한의학의 관점에서는 매일 먹는 음식을 통해서도 어떻게든 우리 몸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할 수 있고, 그렇다면 음식이 곧 약과 같은 기능을 너끈히 수행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리라.
  
‘보약(補藥)’의 사전적 의미는 ‘몸의 기력을 보충해주는 약’이라 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질병의 치료를 목적으로 비교적 단기간 사용하는 화학물질을 약 혹은 의약품이라 일컫는 걸 고려하면 보약은 약이라기보다는 약과 음식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독특한 식품들의 집합체일 것 같다(실제로 신약에 요구되는 수준의 임상시험이 새로운 보약 출시에는 불필요하다). 물론 과거 그 카테고리는 대부분 보약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요사이 이른바 ‘건강기능식품’이라 불리는 거대한 시장이 거기에 들어가면서 전통적인 보약과 경쟁을 하거나 아예 ‘인수합병(?)’이 일어나고 있다.
  
밥도 아니고 약도 아닌, 어쩌면 일종의 보약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법한 기능성 제제로서 내 관심을 최초로 끈 것은 ‘비타민 C’였다. 새콤한 과일에 많이 들어 있고 괴혈병을 방지하는 기능을 가진 수용성 비타민 아스코르브산, 즉 비타민 C는 통상 하루 섭취량이 100mg 정도면 충분하다고 알려져 있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런 일반적인 섭취량의 수십 배를 먹는, 이른바 ‘비타민 C 메가도스’ 요법이었다. 하루 10g 이상의 비타민 C를 꾸준히 섭취함으로써 감기 예방은 물론이고 암이나 뇌졸중, 당뇨병 등등 온갖 만성 난치성 질환까지 예방하고 일부에서는 치료 효과까지 보인다니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는 지경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의사들 가운데 비타민 C 메가도스 요법 신봉자들이 꽤 있었다. 함께 모교 기독교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친한 선배님이나, 몇 해 전 세상을 떠났지만 미국에서 비타민 C 연구로 꽤 명성을 얻었던 내 의대 동기나 다들 고용량 비타민 C의 효과에 대해 설파할 때 공통적으로 보였던 모습은 학문적 자신감을 넘어 거의 종교적인 신념이었다. 비타민 C의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일이 마치 그분들의 거룩한 사명 같았다. 나는 이들을 농담 삼아 ‘비타민 C교 교주 혹은 신도들’이라 불렀는데, 가끔 태블릿이 아닌 하얀 가루약 형태의 비타민 C를 스푼으로 퍼먹기까지 하는 추종자들을 보면 그들의 믿음은 어지간한 종교단체의 그것 이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친한 친구와 선배님 덕에 나 역시 비타민 C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이 직접 쓴 비타민 C 관련 서적과 각종 문헌들을 접하게 되었다. 원래 과학 논문이라는 게 어떤 가설을 지지하는 것들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것들도 있게 마련이다. 소위 ‘근거중심의학’에서는 이 찬반 논문들을 모조리 검색하여 나무가 아닌 숲의 관점에서 본 결론을 도출하는데 이런 방법론을 ‘메타분석’ 혹은 ‘체계적 문헌고찰’이라고 한다. 신약도 아닌 비타민 C 연구에 많은 돈을 투자할 제약회사가 없다는 게 이유라고 하지만, 비타민 C 메가도스 요법의 경우 잘 계획된 대규모 무작위 임상 연구들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아쉬움이 있었다. 아무튼 비타민 C 관련 논문들을 읽는 중에 ‘비타민 C교 신도들’의 믿음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란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고 내게도 하루 3내지 4g의 정도의 비타민 C는 섭취해 볼 믿음이 생겼다.
  
얼마 전 과로로 내가 우리 병원에 일주일가량 입원하고 난 뒤부터 체력이 영 이전 같지 않아 주위에서 내 건강을 염려하는 분들이 생겼다. 급기야 모 한의대 교수로 있는 친구가 ‘공진단(供辰丹)’이라는 환약을 여러 알 건네주었다. ‘공손하게(拱) 북극성(辰)을 받드는 알약’이란 뜻으로 여기서 북극성은 황제를 말한다. 옛날 황제들이 기력 회복을 위해 먹었다는 보약인 공진단에는 사향, 녹용, 인삼 등등이 들어 있다. 친구는 자기가 신뢰하는 한의사가 좋은 재료를 엄선하여 제조했고 자기 어머님도 효험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덧붙였지만, 처음엔 선뜻 복용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기에 다른 의사 결정을 할 때 늘 그랬듯이 자료부터 찾아보았다.
  
공진단의 경우, 알코올성 간염 환자의 간 기능 개선을 비롯해 치매, 빈혈, 중풍 환자 등에서 효과를 보았다는 증례보고 수준의 임상 논문이 조금 있었고 항산화 작용이나 항염 작용이 있다는 실험실 논문도 있었다. 믿음이 조금은 생길 것도 같았다. 체력 보충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절박감이 약간은 내 판단에 긍정 편향을 주었을지 모르겠으나 소수라도 문헌적 근거를 확인했고 믿을만한 이로부터의 경험을 전해 들었으니 플라세보 효과를 뛰어넘는 수준의 ‘보약다움’을 나도 경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이처럼 밥과 약 사이에 존재하는 보약은 그 효과를 보기 위해 믿음을 필요로 한다(그게 보약의 속성 아닌가 싶다). 하지만 종교적인 믿음조차 과학과의 양립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시대에 건강을 위해 인체에 들어가는 식품의 효과를 무조건적 믿음만으로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각종 ‘보약’들의 문헌적 근거를 꼼꼼히 찾아 정리하고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작업이야말로 의료인이 해야 할 보람 있는 일 가운데 하나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비록 먹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방대한 양의 강력한 문헌적 근거를 보유하고 있는 진짜 보약은 따로 있다. 그건 바로 ‘충분한 수면’이다. ‘잠이 보약이다’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잠은 보약 이상이다. 수면 부족 상태에서는 어떤 음식도, 어떤 보약도 건강 증진 효과를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밤늦게까지 글을 쓰며 비타민 C와 공진단 효과를 다 날려 보내는 내가 문득 안쓰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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