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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내비게이션
인간 내비게이션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9.0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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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69)

함께 골프를 자주 치러 다니는 친구 중에 운전 버릇이 좀 과격한 친구가 있다. 이전에 스포츠카를 많이 몰아서 그런지 급가속, 급감속을 예사로 한다. 어느 날 그의 차로 골프장을 향하다가 혹시나 해서 요즘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앱이 기본으로 제공하는, 본인의 ‘운전점수’를 좀 보여달라고 했다. 평소 그런 기능이 있는 줄도 몰랐다는 그의 점수를 함께 들여다보니 ‘41점’이었다. 나는 내 점수인 ‘99점’을 보여주면서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 중 이 점수가 가장 낮은 자’라고 놀렸다. 그러면서도 아차 싶었던 것은 가끔 그와 함께 어딘가를 가다가 조수석에서 내 스마트폰으로 내비게이션 프로그램을 구동시켰던 적이 생각나서다. 운전은 친구가 하지만 내 스마트폰 앱은 아직 운전사를 감별할 능력은 없다. 그러니 내가 운전점수 ‘100점’을 기록하지 못한 건 순전히 이 친구 차에서 가끔 내 프로그램을 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 세대는 무(無)에서 시작하여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경이적인 기술들을 여럿 경험했다. 개인용 컴퓨터가 그랬고 손안의 휴대폰이 그러했으며 GPS 기술을 이용한 차량용 내비게이션 장치들 또한 그랬다. 단순히 지도상에서 내가 어디 있는지를 나타내고 그 지도 정보를 기반으로 그저 목적지까지의 최단 거리 정도를 알려주던 내비게이션이 요즘은 온갖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최단 시간의 경로를 제공해준다. 경로 서비스만으로 모자라 운전사의 운전 습관에 대한 신랄한 지적질과 맹랑한 점수 매기기까지 일삼으니 내비게이션만으로도 <1984>의 ‘빅브라더’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트리플 에이(AAA)’라 불리는 ‘미국 자동차 협회(American Automobile Association)’의 오피스는 과거 자동차로 미국을 여행하려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 자동차 여행과 관련된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는데 그중 사람들이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아마 지역의 세세한 도로 정보가 빠짐없이 수록된 ‘트리플 에이 로드맵’이었을 것이다. 차량용 내비게이션 시대가 열리기 이전, 미국의 고속도로나 국도를 오가는 차의 조수석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트리플 에이 지도를 크게 펴들고 바깥 경치나 도로표지판과 부지런히 맞춰보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대개 운전자의 아내가 그 역할을 맡았기에 어쩌다 출구를 놓치거나 도로 번호를 혼동하여 잘못된 길로 접어들면 조수석의 안내자가 잘못해서 그리됐다고 부부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어떻든 새 경로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달리는 차 속보다 휴게소에 들러 커피라도 한잔 들이키면서 지도에 새롭게 색칠을 하는 게 훨씬 안전했으니, 잠깐의 실수가 도리어 휴식의 기회가 된 셈이다.
  
미국 연수 시절 내가 애용했던 차량용 내비게이션 브랜드는 ‘가민(Garmin)’과 ‘마젤란’이었다. 주로 신형인 ‘가민’을 쓰면서, 선물 받은 ‘마젤란’은 백업용으로 차에 보관했지만, 이름만 놓고 보면 ‘마젤란’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설립자 두 사람, 즉 ‘개리 뷰럴(Gary Burrell)’과 대만계 미국인 ‘민 카오(Min Kao)’의 이름을 합쳐 만들었다는 밋밋한 브랜드보다는, 세계 최초로 지구를 일주했던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야말로 뭇사람들이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길 찾기 기기에 딱 어울리는 이름 아닌가. 아쉬운 점은 이들 기기를 쓰게 되면서 예전에 지도를 보며 길을 찾다 혹시 잘못 들게 되면 마음을 추스르고 잠시 쉬어가던 여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Recalculating!” 한 마디를 크게 외치고 금세 새로운 길을 다시 찾아주는 신형 내비게이션의 충직하고 섬세한 기능은 여러모로 운전자에게 안도감을 주었지만, 잠시의 쉼도 없이 그리고 창밖의 경치를 감상할 일말의 여유도 없이 그저 모니터의 경로 표시에만 집중하게 하는 그 효율성이 어느 날 문득 피로감으로 내게 다가왔다.
 
효율성에 대한 피로감과 더불어 섬찟하게 다가온 또 다른 문제의식은 내비게이션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에 사람들이 점점 중독된다는 것이다. 마치 전화기에 연락처 자동저장 기능이 생기면서 우리가 머리로 기억하는 전화번호가 거의 없어진 것처럼, 내비게이션의 편리함은 과거 지도를 보면서 우리가 가는 경로를 찬찬히 점검하고 가는 길의 대략적인 랜드마크도 확인하는 작업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내비게이션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다가 이미 여러 차례 지나간 길임에도 매번 새로운 느낌이 드는, 지리적, 공간적 감각의 퇴화를 다들 경험하고 있지는 않은지.
  
10여 년 전 중국 일부 도시에서 이른바 ‘인간 내비게이션’이란 직업이 성행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이들은 고속도로에서 막 나와 시내로 진입하려는 트럭 운전사들에게 자기들을 길 안내자로 써달라는 팻말을 들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중국 대도시에는 트럭 진입이 허용되지 않는 도로들이 많은데 그곳에 실수로 잘못 들어갔다가 물어야 하는 벌금보다 도시 사정을 잘 아는 이들 인간 내비게이션을 유료로 이용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이런 직업을 탄생시켰다. 최근의 사정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사실 이런 문제들은 차량용 내비게이션의 기술이 고도화되면 당연히 다 해결되는 것들이다. 다만 내가 이런 보도에 끌렸던 건 내비게이션 앞에 붙은 ‘인간’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차를 타고 어딘가를 즐겁게 여행하거나, 비즈니스를 위해 약속 장소를 급히 찾아가는 것 정도만 있는 게 아니다. 인생 전체가 우리 앞에 놓인 길고 험난한 길이 아닌가. 목적지까지 무사히 당도하려면 인생길에도 내비게이션이 필요할 터이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티맵이나 카카오내비가 아닌 ‘인간 내비게이션’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잠시 길을 잘못 들어서더라도 ‘Recalculating’을 외쳐대며 즉각 다른 길을 제시하는 기계 말고, 휴게소에서 차분히 차 한잔을 나누며 전체 지도를 찬찬히 점검해보고 다시 길 떠날 힘을 북돋워 주는 인간 내비게이션. 우리 인생이 꼭 효율성과 편리함만을 추구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서둘러 종착지에 도착해야 할 이유 또한 전혀 없으니 동료와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인생길에 경험과 지식 그리고 애정을 장착한 인간 내비게이션이 되어주겠다는 팻말을 써 들고 슬쩍 한번 다가가 보는 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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