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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린과 트리암시놀론
에린과 트리암시놀론
  • 전성훈 변호사
  • 승인 2022.08.30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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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55)

‘기획소송’이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의뢰인이 변호사를 찾아가서 사건을 맡기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달리, 이는 다수의 피해자들이 발생한 또는 예상되는 상황에서 변호사가 ‘소송을 기획하여’ 다수의 피해자들에게 소송 참여를 권유하여 시작되는 소송을 뜻한다.

202개의 로스쿨이 있고 130만 명이 넘는 변호사가 활동하고 있는 ‘변호사의 천국’ 미국에서 기획소송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미국에서도 ‘레전드급’으로 남아 있는, 많은 미국 로스쿨들에서 강의할 때 사례로 들고 있는 기획소송이 있다.

에린 브로코비치는 두 번 이혼한 후 아이 셋을 혼자서 키우고 있는 실직여성이다. 계속하여 구직에 실패하던 중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한다. 통장에 단지 16달러만 남아 있던 절망적 상황에서 그녀는 보상금이라도 받아보려고 변호사 에드를 선임하지만, 패소하고 소송비용만 떠안게 된다. 변호사비용도 치를 수 없었던 그녀는 에드의 로펌으로 찾아가 막무가내로 출근을 통보한 후(?) 일을 시작하고, 사람 좋은 에드는 못 이겨 승낙한다. 하지만 그녀의 험한 입담과 미인대회 출신다운 노출 심한 복장 때문에, 로펌의 점잖은 직장동료들은 그녀를 곱지 않게 본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에게 맡겨진 서류 정리 같은 단순업무를 포함해서 로펌 직원의 업무를 배워나간다.

그러던 중 그녀는 서류 중에서 PG&E와 관련된 의료기록을 우연히 발견한다. 이를 살펴보고 그녀는 힝클리 마을에 위치한 PG&E 공장이 방출한 폐수에 1급 발암물질인 6가크롬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것이 마을의 지하수를 오염시켜 마을 사람들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6가크롬이 안전하다는 PG&E의 홍보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녀는 직접 마을을 찾아가 사람들을 만나고, 조사와 자료 수집을 진행한다. 변호사 에드는 처음에는 자산 30조 원이 넘는 초거대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 제기에 소극적이었지만, 그녀가 엄청난 열정으로 수집한 충실한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설득하자, 그리고 마을 주민 650명 중 600여 명의 위임장을 받아오자, 승소 가능성을 발견하고 PG&E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PG&E는 마을 사람들에게 허위사실을 설명하고, 그녀를 인신공격하고, 마을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소송 진행을 방해한다. 게다가 길어지는 소송에 지친 일부 마을 사람들은 승소에 의구심을 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면서 불굴의 추진력으로 소송을 밀어붙인다. 변호사인 에드가 감동할 정도로 말이다.

소송 중간에 PG&E는 턱없이 적은 금액을 제시하며 마을 사람들과 합의하려 하지만, 그녀와 에드는 이를 거부하고, 치열한 공방 끝에 3억 3,300만 달러의 손해배상 합의를 이끌어 낸다. 이 금액은 1993년 당시 기획소송 보상금으로는 미국 역사상 최고액이었다. 참고로, 에린 브로코비치를 연기한 줄리아 로버츠는 이 영화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런 기획소송의 ‘좋은 예’와 달리, ‘나쁜 예’도 있다. 며칠 전 대법원은 지난 수년간 뜨거운 논쟁거리였던 이른바 ‘실손보험 채권자대위소송’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결론은 실손보험사들의 완패. 게다가 이 판결은 대법관 전원이 심리에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서 내려졌기 때문에, 다시 전원합의체에서 입장을 변경하지 않는 한 변경이 극히 어렵다. 한 마디로 대법원이 ‘못을 박은’ 것이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의사 A는 환자들에게 비염 개선을 위해 트리암시놀론을 주사하고 총 3,800만원의 진료비를 받았다. 치료를 받은 환자들은 B보험사에서 실손보험금을 수령했다. 그런데 이후 B보험사가 ‘① 비염 개선을 위해 트리암시놀론을 주사하는 것은 신의료기술로 평가받지 못한 이른바 임의비급여 진료행위에 해당하므로 무효이고, ② 따라서 환자는 의료기관에 부당이득을 반환청구할 권리가 있으며, ③ 환자가 이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므로 B보험사가 환자의 이를 대위행사한다’고 주장하면서 의사 A에게 부당이득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제1심과 항소심은 실손보험사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실손보험사는 환자의 권리를 대위행사할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고 소를 각하했다. 특히 대법원이 ‘① 보험사가 자신들이 판단을 잘못하여 보험금을 지급해 놓고서 나중에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의료기관에 대해 환자의 채권을 대위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보험사의 과실에 따른 보험사의 손실에 대해 (의료기관의 재산으로) 사실상 담보권을 취득하게 하는 것이어서 부당하다. ② 보험사가 주장하는 이러한 형태의 채권의 대위행사를 허용한다면, 명시적 법률 규정 없이 채권자의 제3자에 대한 직접청구권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우리 법체계 전체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 ③ 이러한 보험사의 주장에 따른다면, 현행 민사집행법 체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민사집행제도 전반의 균형과 안정을 깨뜨리는 위험을 야기할 수 있다’고 명확하게 판시한 것은 법조인으로서 통쾌하기까지 하다. 

자신들의 상품 설계 실패와 과열 경쟁에 따른 손실을 ‘의료기관으로부터’ 보충하고자 했던 실손보험업계의 야심찬 시도는, 대법원 판결과 함께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실손보험업계는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환자들에 대해’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업계의 대응이, 법리적 맹점은 회피할 수 있겠지만, 보험제도의 공공성에 반하는 시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수년간 의료계는, 실손보험업계가 1,000억 원을 내놓으라며 제기한 무리한 소송들에 대응하느라 몸살을 앓았다. 재판청구권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이고, 영리회사도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이지만, 소송은 공짜가 아니며 많은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게다가 의료기관들을 상대로 한 이러한 ‘나쁜’ 기획소송은, 의사가 환자에게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어 결국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6가크롬과 같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을 계기 삼아 앞으로 실손보험업계가 의료기관들에 대한 무리한 기획소송을 자제하게 되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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