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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문인회 수필 릴레이 5] 나목의 비밀
[의학문인회 수필 릴레이 5] 나목의 비밀
  • 의사신문
  • 승인 2022.07.15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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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린 원장(차앤박 피부과 도곡양재점)
           이하린 원장

며칠 사이에 대기의 질이 확연히 달라졌다. 하늘은 조금 더 파래지고 바람은 부드러워졌다. 햇살이 내려오는 각도는 더 가까워지고 투명해졌다.

그것은 바람과 비에 씻겨진 공기의 변화만이 아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봄이 온 것이다. 반가운 옛 친구가 예고 없이 찾아온 듯 내 마음은 기쁨에 들뜬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에는 나뭇가지가 수줍게 레이스 커튼처럼 시야를 가리고 있다. 가슴이 설레이는 이 시기는 아쉽게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젊은 시절의 나에게 나무는 뜨거운 햇살을 가려줄 그늘을 제공하는 식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화려한 꽃보다 나무가 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스스로 내가 꽃이라 생각했던 자부심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풋풋하고 젊은 여자들이 예뻐 보이기 시작하던 때였으리라. 긴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도, 몇 년 만에 방문한 고궁의 뜰에서도 나무는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사실이 눈물겹게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아마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나무를 보는 기쁨으로 걷는 일이 더없이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온 뒤 하루 만에 나뭇잎의 빛깔이 달라지거나, 며칠 사이에 다투어 움트는 꽃봉오리를 보면서 생명의 신비를 새삼 느꼈다. 봄부터 가을까지 나무는 여러 종류의 행복감을 다양하게 선사해 주었다. 그러다 겨울이 오면 봄이 다시 오기까지 길고 지루한 시간을 마른 나뭇가지를 보면서 기다려야 했지만.

그런데 지난가을 어느 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의 하늘이 갑자기 새롭게 보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그동안 같은 길을 걸으면서 보았던 달이 나뭇가지 사이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잎을 떨군 나뭇가지는 해가 저무는 하늘과 초승달을 돋보이게 하는 최고의 프레임이었다. 그 조연으로서의 나뭇가지를 인식하고 나서야 나는 나무의 본체를 제대로 살펴보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좋아했던 것은 봄부터 가을까지 나무를 치장하고 있던 나무의 옷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뭇잎을 모두 떨군 뒤 나뭇가지의 윤곽을 새롭게 관찰하면서 나신(裸身)으로서의 나무를 다시 보고 그리고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개업 초년병 시절, 근처에 계신 여자 원장님들과 일주에 한번 씩 점심 식사를 하는 모임이 있었다. 막내로서 그 모임의 총무가 된 나는 점심시간 마다 그분들에게 여러 인생 경험과 개업에 관한 소중한 정보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알게 된 선배님 중 한 분은 십년 전부터 양평에 조그만 터에 집을 짓고 주말 농장처럼 농사를 짓기 시작하셨다. 남편분이 오래전부터 꿈꾸어 오던 생활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정성을 기울여 농사지은 싱싱한 상추나 토마토를 멤버들에게 나누어주시곤 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몇 년 전 병원을 정리하고 퇴직하신 선배님 부부가 지난 가을, 나를 시골집으로 초대해주셨다.

바깥 원장님은 글을 쓰시고 선배님은 그림을 그리시고 빵을 구우며 자연으로 돌아가서 건강하게 사시는 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평화로웠다. 한 병원의 원장과 대학교수라는 직책을 벗어던지고 자연과 동화되어 사시는 모습은 낙엽을 떨구었지만 황혼을 배경으로 멋들어지게 서 있는 나무를 생각나게 했다. 어쩌면 이제서야 가장 스스로다운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시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신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한정이 없어서 무엇인가 얻으면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선배님 부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고 계셨다. 인생의 본질과 진정한 행복을 일찍이 깨닫고 재산과 명예라는 겉껍질을 스스로 벗어버린 일종의 현자의 모습이었다. 

녹음이 우거지거나 화려한 꽃 또는 열매로 치장하고 있는 나무를 우리는 대체로 환영한다. 그것들이 벗겨진 뒤 마른 가지가 드러난 나무는 볼품없고 쓸쓸하기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사람 또한 그를 둘러싼 환경과 이력들로 인해 그 사람의 본질이 가려질 때도 많다. 화려하게 나를 치장하고 있는 것들로 인해 어쩌면 나조차 나의 본질을 잊고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겨울나무가 더 이상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껍게 말라 있는 나무껍질 속의 생명력이 느껴지자 마치 보물 상자를 찾은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로소 그 속에서 봄을 준비하는 부지런한 박동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추운 겨울 동안 신비한 생명력을 그 안에 간직한 채 오랜 시간을 견디어 온 모습이 그저 대견할 뿐이다. 

겨울나무가 새싹을 다시 틔우기 시작했다. 나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저력을 지니고 있다. 미세 먼지가 많거나, 바람이 불거나, 주변 환경이 어떻든 개의치 않고 나무는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오직 나를 키우는 햇빛과 바람을 바라보며 그곳을 향해 온 정성을 다해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오면 미련 없이 낙엽을 떨구고 새로운 생명을 위해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무에게서 나는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배운다. 

봄은 봄이로소이다(20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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