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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메시지의 위험성
잘못된 메시지의 위험성
  • 의사신문
  • 승인 2022.07.0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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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53)

영화 ‘반딧불이의 무덤(火垂るの墓)’을 아시는 분은 많지 않을 것 같다. 1967년 출판된 노사카 아키유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1988년 만들어진 일본 만화영화이다.

이 영화는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오빠 세이타, 여동생 세츠코가 겪는 피난 생활을 다룬 작품이다.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워낙 오래된 영화이니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면, 일본 해군 대위인 아버지는 전쟁 중 전사하고, 어머니는 공습으로 전신에 화상을 입었지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고, 4살인 여동생 세츠코는 영양실조로 죽고, 결국 14살인 오빠 세이타도 부랑아가 되어 길거리에서 아사한다.

이 영화에는 ‘가장 강력한 반전영화’라는 극찬과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비난이 모두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국민들이 극심한 궁핍을 강요당했던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독일은 2차대전 중에도 국민의 생활수준 유지를 중시하여, 군수품을 희생해서라도 전쟁 전의 80% 수준을 유지했다. 하지만 일본은 국민들의 생활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는데, 특히 태평양전쟁 시작과 함께 ‘배급제’를 확대하면서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떨어졌다. 예를 들어 가장 중요한 주식인 쌀은 성인 1명당 하루에 160g(밥 1.5공기!)을 배급했는데, 이마저도 전쟁 말기에 가면 잡곡과 혼합하여 배급했다. 주식인 쌀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물자는 더 말할 것도 없는 수준이었다. 국민들은 굶주렸고, 서로를 잠재적인 도둑으로 보았다. 민심은 흉흉해졌고, 공동체들은 붕괴되었다. 위 영화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이렇게 일본 국민들이 극심한 궁핍을 겪게 된 것은, 미국이 태평양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고 동남아와 일본을 오가는 일본 선박들을 모조리 격침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최일선에서 싸우는 군인들조차도 아무런 보급을 받지 못했다. 일본은 동남아 곳곳에 강제징용된 일본 젊은이들을 배치했지만, 이들은 단지 본토 방어 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한 ‘버리는 돌’이었다. 그래서 전사한 일본군 230만 명 중 60%인 140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리고 선박이 격침되어 해몰사한 군인도 40만 명에 이르렀다. 정작 싸우다 죽은 군인은 20% 남짓밖에 되지 않았고, 그 중 상당수도 ‘자살 돌격’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이길 수 없음이 명백해진 상황에서도 왜 일본 국민들은 전쟁을 그만두자는 결정을 하지 않은 것일까? 당시 일본에는 선거로 선출된 의회와 정당들이 있었고, 여러 언론사들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일본 군부가 ‘대본영 발표’라는 형태로 일본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잘못된 메시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즉 ‘전황은 유리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청일전쟁, 러일전쟁처럼 승리할 수 있다’는 내용의 메시지들을 말이다. 군부의 막대한 뇌물을 받고 있던 정치권은 여기에 침묵했다. 그리고 잘못된 메시지를 받은 일본 국민들은 당연히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정치권에 대한 현대 일본 국민들의 불신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얼마 전 용인 소재 의료기관 응급실에서,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실려 와서 사망한 아내에 대한 병원의 조치에 불만을 품은 70대 보호자가 담당의사의 목을 낫으로 찍는 살인미수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열흘도 안 되어, 부산 소재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아내를 빨리 치료해 주지 않는다면서 60대 보호자가 응급실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는 방화 사건이 있었다.

의료인에 대한 이러한 폭력행위와 보복범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처벌을 강화하는 법 개정 등 이에 대한 대책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여러 대책들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의료인에 대한 폭력행위와 보복범죄의 빈도와 정도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 악화의 원인은 법이 사회구성원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진료 중인 의료인에 대한 폭력행위와 보복범죄는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가법)’에 조항을 신설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되었음에도, 여전히 의료법과 응급의료법으로 처벌하고 있다. 그리고 의료인에 대한 폭행.협박에 대한 반의사불벌 조항 폐지 역시 오래전부터 주장되었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가족을 진료한 의료인에 대한 폭력행위와 보복행위를 가족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과시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지만 이들을 용납하는 잘못된 사회 분위기가 있는 현실에서, 그리고 의사들 중 무려 78%가 1년 내에 진료 중 폭언.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지만 경찰은 가해자를 대부분 ‘훈방’하고 있는 현실에서, 법이 ‘진료 중인 의료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반드시, 무겁게 처벌된다’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사회구성원들에게 주고 있지 못한 것이다.

반면 운전 중인 자동차 운전자에 대한 폭행.협박은 특가법으로 처벌하고 있으며, 반의사불벌 조항이 없다. 즉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고 피해를 배상하여 합의하더라도, 형량을 정함에 참작하기만 할 뿐 반드시 처벌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법이 ‘승객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이런 행위는 반드시, 무겁게 처벌된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사회구성원들에게 주자, 이런 행위는 예전에 비하여 감소하기 시작했다.

원시야만시대를 넘어, 중세와 근세를 넘어, 군부독재 시대를 넘어 이제 우리 사회는 비할 수 없이 문명화되었다. 폭력은 그 크기나 이유에 관계없이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 되고, 특히 진료현장에서의 폭력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이 사회구성원들에게 명확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줄 수 있도록, 반드시 관련 법 개정이 필요하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진료현장은 비폭력지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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