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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파트론’의 원류를 찾아서
‘추파트론’의 원류를 찾아서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7.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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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66)

내 생각에 중고등학교 시절 어디서나 주요 과목으로 여기는 국, 영, 수, 3개 교과 가운데 영어와 수학은 비교적 학습 목표가 분명하고 선생님들 간 가르치는 내용에도 큰 차이가 없는 듯했다. 하지만 국어는 선생님마다 교육하는 방식과 강조하는 포인트가 천차만별이라, 비록 우리의 말과 글일지라도 하나의 교과목으로서는 도무지 표준화가 안 되어 있는 분야란 느낌을 받곤 했다. 
  
그래도 다른 과목이 넘보지 못할 국어 과목만의 미덕이 있다면 세월이 오래오래 지난 뒤라도 별안간 옛날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시 한 구절, 수필 한 문장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 구절에 밑줄을 긋고 문장을 암기할 때의 풋풋한 추억 역시 고스란히 전달해주면서 말이다. 수필의 경우, 내게는 민태원의 <청춘 예찬>이나, 피천득의 <인연> 같은 작품이 바로 그런 종류였다.
  
골치 아픈 병원 일에 전전긍긍하다가 이내 마음도 몸도 축 처질 때면, ‘청춘의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과 같이 힘이 있다’며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던 <청춘 예찬>의 힘찬 도입부를 떠올려 본다.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인간관계들이 점점 과도하게 쌓여가면서 편안하고 따뜻한 만남이 간절해질 때면,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라는 <인연>의 애틋한 마지막 부분을 읊으며 그리운 이들에게 오랜만에 문자메시지를 보내본다.
  
대학에 들어가 교양과목 시간에 배운 국어는 중고등학교 때만큼 그리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시절 배웠던 유머러스한 수필 하나가 희한하게도 장기기억의 영역으로 쑥 들어왔기에 가끔 그 글을 회상하며 미소 지을 때가 있다. 내가 기억하는 내용은 대강 이렇다. 우리가 ‘육감(六感)’이라 부르는 신비로운 감각이 실제로 있다면 당연히 그걸 담당하는 신체 기관도 있을 것이다. 고금의 여러 증거를 보아하니 그 담당 기관은 바로 머리와 머리털이 틀림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육감’의 실체가 되는 작은 입자들이 머리털을 통해 방출되거나 받아들여지며 이때 오가는 알갱이를 저자는 ‘사고자(思考子)’라고 부른다. 
  
대략 이 정도 기억만 가지고 어느 날 인터넷을 열심히 뒤지다가 이 수필은 <사고자(思考子)와 추파트론(秋波tron)>이란 특이한 제목으로 1967년 동아일보에 실렸던 칼럼이었고 이를 다시 모교 출판부에서 교양 국어 교과서에 수록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생각을 골똘히 하거나 꿈을 꿀 때 발생 되어 공기 중에 무수히 떠다니는 ‘사고자’ 중에서 특히 남녀 사이 애정이 가미된 것을 저자는 별도로 ‘추파트론’이라고 명명하였다. ‘추파를 던지다’라고 할 때의 바로 그 ‘추파’에다 알갱이를 뜻하는 접미사 ‘-트론(tron)’을 더한 것이다.
  
정적들에게 살해당한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는 죽기 전날 밤 위험예고 '사고자'가 자기 머리털에 감지되었건만 불행히도 ‘반(半) 대머리’였던 그의 부실한 안테나로는 도저히 암살을 피해갈 수 없었다. 반면에 젊고 머리숱 많았던 그의 부인은 잠자면서까지 불길한 '사고자'를 감지하였기에 시저의 출근길을 말렸다고 한다. 군대에서 신병들을 삭발시키는 건 세속적 ‘사고자'의 수신을 차단하는 조치며, 유교 신봉자도 아닌 비틀즈 멤버들이 머리를 안 깎는 건 요염한 '사고자'인 ‘추파트론’ 수집에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고자'와 ‘추파트론’의 존재와 영향력에 관해 저자가 제시하는 여러 가지 논거들은 그 짤막한 수필을 읽는 내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게 한다. 짐짓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을 시도하는 듯한 티를 내지만 오히려 그게 바로 독자들의 큰 웃음을 유발하지 않는가. ‘아, 글쓴이가 과학자였지’ 하는 생각에 그제야 저자 프로필을 유심히 보게 되었는데 그는 1967년 당시 원자력연구소 연구원이었던 이창건 박사였다.
  
1929년에 태어난 이창건 박사는 훗날 원자력문화진흥원 원장을 역임하게 되는 대한민국의 1세대 원자력공학자다. 2009년 UAE에 원자력발전소 4기 수출이 확정되던 날 그분은 감격에 겨워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았고 거기서 원자력발전에 선견지명이 있었던 네 사람의 전임 대통령들께 각각 감사의 메시지와 함께 술잔을 올렸다는 일화는 여러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유명하다. 그는 또한 국내 최초로 TRIGA 원자로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분이기도 하다.
  
길 하나를 두고 우리 병원과 마주하고 있는 한전 연수원에는 1962년에 가동을 시작하여 30여 년 동안 운영된 대한민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시설이 있다. 훈련(Training), 연구(Research), 동위원소(Isotope) 생산의 목적으로 미국의 ‘General Atomic (GA)사’에서 만든 것이기에 앞 글자를 따서 TRIGA라고 말하는데 이 원자로를 조작할 자격을 이창건 박사가 처음으로 갖추었다는 뜻이다. 기억에 남는 수필 하나에서 시작된 인연의 연결고리가 왠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나중에 우리나라 원자력계의 거목이 된 분이라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난 여전히 그를 <사고자와 추파트론>이란 해학 넘치는 멋진 수필을 쓴 38세의 젊은 연구원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 수필의 마지막 문단, 그러니까 그분이 자신의 '사고자'를 그토록 많이 만들어내고 싶었던 이유가 육이오 때 북쪽 하늘에 두고 온 누님과 벗들에게 그걸 쏘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부분을 읽으면 직전까지 내내 웃다가 이산가족의 아픔에 문득 숙연해진다.
  
어쨌든 내친김에 지금의 나보다 한참 어린 38세의 저자 이창건에게 한 가지 조언을 덧붙이자면 아무래도 '사고자' 가운데 특수형태인 ‘추파트론’은 머리털에서 나오는 입자가 아닐 거란 점이다. ‘가을철의 잔잔하고 맑은 물결’처럼, 남녀가 원초적인 갈망을 담아 내보내는 알갱이의 출입구는 ‘눈(eye)’일 게 분명하다. ‘추파’는 원래 아름다운 여인의 ‘눈빛’에 비유되던 표현이었기에 ‘추파’의 원류는 우리 눈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러니 파마를 해서 머리를 세울 게 아니라 늘 눈을 크게 부릅뜨고 다닐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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