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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둘, 몸은 하나
머리는 둘, 몸은 하나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6.2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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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65)

모교 진단검사의학과에는 과거 의대생 시절부터 요란한 연애로 화제를 뿌렸던 여선생님들이 더러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분은 일찌감치 의대 선배와 ‘캠퍼스 커플’이 되어 공부는 물론 동아리 활동까지 딱 붙어서 열심히 했으니 자연히 여러 사람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워낙 출중한 용모의 남녀가 학교 곳곳에서 심하게 친밀함을 과시한 탓이었을까. 누군가 질시 어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도서관에 머리는 둘인데 몸은 하나인 괴생명체가 종종 출몰한다고.
 
그때야 물론 두 남녀의 사랑과 이에 대한 주변의 시샘이 어우러져 그런 전설적인 생물을 탄생시켰겠지만, 얼마 전에 난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 그와 유사한 생명체 이야기를 심각하게 하고 있었다. 바로 올해 우리 병원 노사 간에 단체협상을 시작하는 자리였고 내가 소환한 생물은 사람이 아니라 머리는 둘에 몸은 하나인 새, 소위 ‘일신이두조(一身二頭鳥)’였다.
  
한 해가 끝나갈 때마다 <교수신문>에서는 그해를 상징할 만한 사자성어를 하나씩 선정한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직전인 2019년 말, 대한민국은 ‘조국 사태’라 불리는, 진영 간의 극심한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고 교수신문에서는 이런 세태에 경종을 울리고자 머리가 둘에 몸은 하나인 새를 의미하는 ‘공명지조(共命之鳥)’를 2019년의 사자성어로 선정했다. 거기엔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로, 어느 한쪽이 없어지면 자기만 살 것 같이 생각하지만 그러다간 모두 죽고 만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불경에 등장하는 ‘공명지조’는 ‘운명(運命)을 공유(共有)하는 새’란 뜻으로 ‘공명조’라고도 불린다. 이 새는 몸은 하나지만 머리가 둘이라, 머리 하나가 잘 때 다른 하나는 깨어 있다. 어느 날 머리 하나가 맛있는 열매를 발견하고 그것을 실컷 먹어버리자 다른 머리는 자기가 자고 있을 때 혼자서만 맛난 것을 먹은 머리에 앙심을 품었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복수를 하겠다고 독이 든 열매를 냅다 먹어버렸고 결국 하나의 몸을 지닌 ‘운명공동체’였던 두 개의 머리는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다.
  
매년 노사가 임금이나 기타 근로조건 개선 같은 현안을 두고 협상을 벌인다. 보통은 초여름에 시작하여 삼복더위를 훌쩍 지나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쯤 가까스로 타결되는 코스를 밟는데 그 과정에서 자칫 협상이 삐끗하면 언제든 파국을 맞게 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에 늘 조마조마하다. 나는 노사협상 자리에서 수년간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부르짖어 왔다. 하지만 올해 초 몰아닥친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로 인해 의료진이 초토화되는 어려움을 겪었던 병원 사정을 생각하면 이번엔 단순히 ‘역지사지’ 정도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다. 그렇기에 첫 상견례 자리에서 굳이 ‘공명지조’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두 개의 머리가 다투다 공멸하는 일은 제발 막자는 의도였고, 노사가 한 몸인 것 또한 꼭 기억하자는 뜻이었다.
  
‘흑역사(黑歷史)’란 흔히 ‘없었던 일로 해버리고 싶은 과거의 일’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원래 있던 한자어인줄 알았더니, 일본의 인기 로봇 애니메이션, ‘건담’ 시리즈에서 유래한 신조어라고 한다. 수천 년에서 수만 년 전 끊임없이 반복되던 우주전쟁의 역사를 그 만화에서 ‘흑역사’라 일컬었던 게 최초의 용례고, 이후 건담 매니아층에 의해 이 말이 널리 전파되어 이젠 어엿한 일상어가 되었다. 마치 ‘지나간 전성기’를 뜻하는 ‘리즈 시절’이란 말이 잉글랜드의 축구선수 앨런 스미스가 ‘리즈 유나이티드(Leeds United)’에서 뛰던 시절에 절정의 기량을 선보였다는 데서 유래된 것과 비슷하다.
  
우리 병원 노사관계에 있어서도 가슴 아픈 ‘흑역사’가 존재한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니 20년도 더 된 이야기다. 노사협상 자리에서 예기치 못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양측의 팽팽한 주장이 타협점을 못 찾고 점점 언성이 높아지더니 마침내 흥분한 노조 측 위원 한 사람이 충동적으로 사측 위원의 얼굴을 쳤다. 피해자가 당시 보직을 맡았던 의사였기에 의사협의회는 격렬히 반발했다. 가해자 징계를 요구하며 집단 사직서 제출이라는 초강수를 두었고 병원의 진료는 엄청난 차질을 빚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직원들은 크나큰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당시 의사협의회 총무를 맡고 있었던 나는 이때 결과적으론 노사를 떠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는지, 그리고 그게 아물 때까지 또 얼마나 오랜 시일이 걸렸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탈무드>에도 ‘머리는 둘 몸은 하나’인 갓난아기 이야기가 나온다. 샴 쌍둥이의 사례를 기록한 게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진 유태인들의 동질성과 연대감을 상징하는 전승으로 보인다. 머리 둘에 몸은 하나인 아기가 태어났는데 생후 1개월째 교회에서 아기를 축복해주는 의식에서 축복을 두 번 해야 하는가, 한 번만 해도 되는가. 탈무드의 답은 이렇다. 한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 다른 쪽 머리도 비명을 지르면 한 사람으로,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으로 보라는 것. 무지막지한 핍박과 박해가 유태인들에게 가해질 때, 전 세계 어디에 살더라도 그걸 똑같은 감정으로 느끼는 게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인 것 같다.        
  
다시 머리는 둘, 몸은 하나인 공명조 이야기다. 애초에 교수신문은 공명조를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반목하다가 공멸하는 몹쓸 새로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치부할 게 아니라는 반론이 있었다. 울산에서 조류생태학을 연구하는 김성수 박사의 견해를 옮긴다. “불경의 공명조는 히말라야의 설산이나 극락에 살고 목소리가 아름답다. 몸 하나에 두 개의 머리가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한 머리는 낮에 일어나 노래하고 다른 머리는 밤에 일어나 노래하는 선순환의 역할을 분담하는 새다. 공명조는 함께 죽는 새가 아닌 함께 노래하는 상생조인 것이다.” (‘공명지조, 아쉬운 비유’ 중에서)
  
공명조가 본래 이렇게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주는 상생조임을 기억한다면 그건 옛날 의대 도서관에 출몰하던, 애정 넘치는 괴생명체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부디 우리의 이번 노사협상에는 그런 종류의 공명조가 훨훨 날아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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