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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문인회 수필 릴레이 3] 의사시인
[의학문인회 수필 릴레이 3] 의사시인
  • 의사신문
  • 승인 2022.06.21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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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준(씨엠병원 내분비내과장, 시인, 수필가) 

“질병 치료엔 약도 언어도 필요하다.” 히포크라테스의 말이다. 여기서 약은 의학 정신에 기초한 지식과 기술을 가리키고, 언어는 과학적 진리와 기술을 정서적 경향과 통합하는 인간 이해를 의미한다. 약은 언어의 도움으로 최선의 약효를 낸다. 그러나 현실은 눈에 띄게 버그러져 있다. 검사 데이터만 수북한 진료실. 마주 보고 앉아 있어도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 점점 더 멀어져, 이제는 아예 환자는 최첨단 진단기기 속에 누워있고, 의사는 동떨어진 곳에서 모니터에 뜨는 숫자와 영상만을 분석하고 있다. 언어가 메마른 의학. 변해야 한다. 미셸 푸코의 어법을 빌리면, 환자의 내부로만 파고들던 의학의 시선을 사람 전체로 돌려야 한다.

시선 전환의 핵심은 질병을 질병으로만 보지 않고 인간 본질의 일부로 인식하는 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인간 이해의 의학이 될 수 있나? 여러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그중에서 문학은 의학과 똑같이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 관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뚜렷한 방안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질병과 관련한 몸과 마음의 고통과 변화의 체험은 고스란히 문학의 소중한 소재이며 주제다. 의사가 아픈 사람을 진찰하고 진단하고 치료하고 예방하듯이, 문인 역시 사람의 고통과 변화에 모든 관심을 쏟아 글을 짓는다. 둘 다 저 깊숙한 인간의 고통과 생명의 의미를 헤아려 그것을 치유하려 한다. 그래서 의학과 문학이 맞닿으면 서로 인간적 본바탕을 자극하여 서로를 더 여물게 한다. “임상적 시선은 작가의 감각과 공통점이 많다.”는 미국 텍사스 의대 마취과학 및 의료윤리학 교수 맥렐란의 말처럼 문학은 의학의 시선을 인간 이해 쪽으로 전환시킨다.  

문학, 그 중에서도 시가 의학의 시선 전환에 나서면 그 전환은 흥겹고 은근하게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시는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시를 짓는 이가 의사, 즉 의사시인이라면 시선 전환에 절절한 체험이 넉넉히 보태어진다.

‘의사시인’은 ‘의사’와 ‘시인’의 합성어다. 합성어는 흔히 대등 합성어, 종속 합성어, 융합 합성어로 나뉜다. 의사시인도 이처럼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의사와 시인의 본래 의미와 역할이 각각 대등한 자격과 용량으로 담겨 있다면 대등합성 의사시인이다. 평생 의업과 시작을 함께한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대등합성 의사시인이다.

용량이 어느 한 편으로 기울어져 의사로서 주로 활동하며 시도 짓는 의사라면 시작이 의업에 종속되어 있다. 물론 시인이 주가 되고, 의사가 종속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의학을 배우고 의사면허는 획득하였으나, 의업은 접고 전업 시인으로 활동하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의사시인’이라 부르긴 해도 실제 환자 진료 경험이 희박하다는 점에서 ‘의사 출신 시인’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스물한 살에 외과 의사가 되었지만, 의학을 접고 시작에 전념했던 존 키츠가 이에 속한다. 필자의 분류로 종속합성 의사시인 중에서 의사 출신 시인이다. 그래서 혹자는 키츠를 ‘의사시인’ 대신에 ‘시인의사’라 부른다.

‘융합’은 ‘다른 여럿이 녹아서 서로 구별이 없게 하나로 합침’이다. 뜻 그대로 의사와 시인이 녹아서 하나로 합쳐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의학과 시문학이 사람의 고통을 동일한 연원으로 공유한다 해도 각각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군을 만들어낼 순 없다. 혹시 시 치료사처럼 의료 현장에서 의사 시인이 활동할 수 있는 새로운 직종이 생겨난다면 가능할까. 융합 합성 의사시인은 아직은 이론상의 명칭일 뿐이다. [「시(詩) 짓는 의사들」 / 유담(『문학청춘』, 2020년)]

의과대학에선 인체 해부학 실습을 한다. 사체를 부위별로 세밀하게 해부하고 익힌다. 비록 생명이 떠난 차가운 심장이고 폐일지라도 한 때 따스한 생명이 있어 박동하고 호흡했었음을 연상하고 하나하나 익힌다. 그렇게 해야 생명을 다루는 진료 현장에서 박동과 호흡의 의미와 생명의 가치를 따스한 냉철로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따스한 냉철이 아픈 이들의 삶의 갈피에 빛을 비추는 시어들로 발광(發光)한다면, 그 시어의 발화자이며 발광체는 바로 의사시인이다.

흰 가운을 입은 그가 신화 속 아폴로가 동시에 구사했다는 치유와 시의 풍요로움을 짓는 모습을 바라보며, 퍼시 셀리의 「아폴론의 찬가」 한 구절을 옮긴다. “악기나 시가의 모든 조화, 모든 예언, 모든 의학은 나의 것, 예술이나 자연의 모든 빛: - 내 노래에 승리와 칭찬 그 자체로 속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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