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0:55 (금)
모비딕
모비딕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6.21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릉역 2번 출구 (64)

몇 년 전 교회에서 진행하는 ‘바이블 칼리지’에 한 학기 등록을 한 적이 있다. 매주 저명한 신학대학교 교수님들을 초청하여 성경에 대해 심도 있는 강의를 듣는 프로그램이다. 강사료며 교재며 강좌 준비에 비용이 들어가기에 참가자들에게는 12만 원씩의 수강료가 책정되어 있었다. 두 번째 강의에 참석했을 때로 기억한다. 휴식 시간에 학사행정을 맡으셨던 담당 목사님이 다가오셔서 조심스럽게 나더러 등록비를 입금했는지 물으셨다. 조금 늦었지만 송금했다고 대답했더니 목사님이 주저주저하시다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게 저... 12만 원이 아니라 12원을 보내신 것 같아서... 한번만 확인을 좀...”
  
급히 계좌 이체 내역을 살펴본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말 ‘0’은 온데간데없고 달랑 ‘12’란 숫자만 찍혀 있었다. 수강료로 12원을 보내다니... 어이없는 바보짓을 한 거다. 서둘러 재송금을 하려는데 고민이 생겼다. ‘12만 원을 보내야 하나, 차액인 11만 9천 9백 8십 8원을 보내야 하나...‘ 이튿날 결국 15만 원을 송금했다. 담당 목사님 마음고생시켰으니 ’위자료‘도 포함해야 한다는 병원 동료들의 날카로운 지적을 수용한 것이었다. 창피스러웠던 이 경험은 그래도 이후에 매사 일 처리를 꼼꼼하게 하도록 만드는 ’양약(良藥)‘으로 작동했다. ’모비딕‘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어느 날 공연을 보러 갔다 잠시 들른 <예술의 전당> 문구점에서 멋진 노트를 발견했다. 말 그대로 이태리 장인이 한땀 한땀 정성을 들여 만든 수제 노트였다. ‘리브리 무티(Libri Muti)’, 그러니까 ‘말 없는 책’이란 뜻의 부제가 붙은 일련의 노트 시리즈들인데 고전문학의 제목을 재해석한 디자인들이 상당히 클래식하고 멋졌다. 단테, 호머, 쥘 베른 등과 같은 유명 작가가 쓴 책 표지들 사이에서 난 허만 멜빌의 <모비딕(Moby Dick)>을 골랐다. 커다란 향유고래가 꼬리를 높이 치켜들고 바다로 뛰어드는 역동적인 그림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지금까지 난 이 노트를 2년째 쓰고 있다. 다이어리처럼 날짜도 없고 눈금도 없지만, 오히려 하얀 백지상태의 노트가 아이디어를 더 자극해서 좋다. ‘말 없는 책’에 ‘의미’와 ‘역사’를 채워가는 작업이 즐겁다. 디자인 덕분에 노트가 꼭 책처럼 보이니까 우리 병원 사람들 중에는 내가 영어소설을 항상 손에 들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고 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함께 회의를 자주 하는 우리 한국원자력의학원의 ‘의학원장님’도 그중 한 사람이다.
  
며칠 전 아침 회의 시간, 우리 의학원장님이 그날도 내가 들고 온 모비딕 노트를 보며 한마디 한다. “늘 영어 원서를 끼고 사는 병원장님 모습, 참 보기 좋아요. 나도 거기에 자극을 받아서 최근에 나온 소설 <파친코>를 원서로 샀답니다. 비교적 쉬운 영어로 쓰였다고 하길래... 하하하.” 아, 그게... 실은 ‘모비딕’ 원서가 아니라 그냥 백지 노트였는데... 결과적으로는 누군가에게 신선한 자기계발의 ’영감’을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영감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못내 찜찜했던 나는 할 수 없이 마음의 부담을 좀 덜어내고자 인터넷으로 ‘모비딕’ 원서를 주문하고야 말았다.
  
올봄에 난 어찌어찌해서 <의사신문>에 연재하던 글을 모아 에세이집을 하나 출간하게 되었다. 다소 민망하지만 그래도 그 책에는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메시지들이 담겨있어서 지인들에게 한 권씩 선물하곤 했다. 최근에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보니 출판사에서 그 책을 ‘큰 글씨 버전’으로 확대해서 만든 것도 판매하고 있었다. 눈이 어두우신 어르신들께 선물하면 좋겠다 싶어 얼른 몇 권을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몇 일이 지나 책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중에, 평소 잘 알고 지내는 기독교계 신문사 기자분에게 문자가 왔다. 큰 글씨 책 보내준 것, 잘 받았다고 고맙다는 인사였다.
  
아뿔싸, 그게 왜 그리로 갔지... 철렁해서 배송과정을 추적해보니 내가 받는 사람 주소를 잘못 입력한 탓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전에 마지막으로 그 기자에게 책을 보냈던 기록이 남아있었는데, 이번에 새로 책을 주문하면서 그걸 다시 내 주소로 돌려놓지 않았던 게 배송이 잘못된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자에게 책을 실수로 잘못 보낸 것이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할 수 없이 덕담 문자를 보냈다. “네, 기자님. 혹시 주변에 큰 글씨 책 필요하신 분 있을까 봐 몇 권 보내드렸어요.”
  
바보, 바보... 스스로에게 한심해할 때, 옛날 목사님께 12원 보냈던 일까지 스멀스멀 떠올라 더 괴로웠다. ‘요사이 병원에 골치 아픈 일이 많았기에 내가 정신이 좀 없었던 거야’ 하고 혼자 변명하면서 다시 한번 정신 차리고 앞으로는 매사 빈틈없이 일 처리를 하자고 결심했는데... 몇 일 뒤에 그 기자분에게서 날아 온 또 한 번의 문자는 내게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오랜만에 사무실로 출근했더니 또 책이 와 있네요. 모비딕 잘 받았습니다. 선물 고맙습니다!!!”
  
모비딕 원서는, 에세이집이 잘 못 배달된 걸 확인하고 난 뒤에 좀 있다가 주문한 건데 그게 또 똑같이 엉뚱하게 기독교계 신문사의 그 기자 앞으로 날아간 것이다. 에혀... 이번에도 주소 바꾸는 걸 깜빡했구나... 기자가 고맙다고 문자 마지막에 세 번이나 붙인 느낌표(!)는 마치 가시 바늘처럼 내 마음을 찔렀다. 아니, 이 양반은 내가 모비딕 원서를 보낸 게 이상하단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나...
  
아무튼 모비딕 원서를 하드카피로 다시 주문하는 건 포기하고 전자책(e-book)으로 막 다운받았다. 허만 멜빌의 명문장들이 내 스마트폰에 얌전히 둥지를 틀었으니 이제는 뜻하지 않은 곳으로 잘못 날아갈 염려는 없다. ‘Call me Ishmael.’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주시오.)로 시작하는 유명한 첫 문장을 한참 들여다본다. 난폭하고 맹목적인 ‘에이허브(Ahab)’ 선장과 스타벅스 커피의 어원이 된 일등항해사 ‘스타벅(Starbuck)’도 곧 만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흰고래, ‘모비딕(Moby Dick)’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될 것이다.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준 것 이상으로 뭔가 큰 수확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생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