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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설립 준비 <8>
병원 설립 준비 <8>
  • 의사신문
  • 승인 2006.10.25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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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 병원 건설안을 제출하다

알렌이 칼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민영익을 치료하는데 성공하자, 알렌과 서양 의술에 대한 기대와 신뢰는 조야(朝野) 상하(上下)에 널리 퍼졌다. 왕과 왕비는 알렌을 직접 불러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선물을 하사했으며, 시의(侍醫)로까지 임명했다. 국왕은 알렌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서양 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서울에도 그와 같은 병원을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는 알렌에게 다시 없는 기회였다. 선교의사로 중국에 갔다가 마땅한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빚까지 진 채 조선으로 흘러들어온 처지에서, 일약 조선 선교 의료의 개척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1885년 1월 27일, 그는 병원 설립안을 작성하여 미국 대리공사 폴크(George C. Foulk)의 소개말을 덧붙여 정부에 제출했다. 그는 이 제안서에서 병원이 자신의 왕진을 받기 곤란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부상당한 병사들을 수용하여 치료하는 시설이 될 것이고, 나아가 조선 젊은이들에게 서양 의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병원이 만들어진다면 그 자신 무보수로 근무할 뿐 아니라, 역시 무보수로 근무할 미국인 의사를 더 데려올 것이며, 정부는 단지 병원으로 쓸 수 있는 건물 한 채와 환자들을 위한 약값과 음식비 등으로 지출할 1년 단위의 운영비만 지출하면 된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이 병원이 문을 열면 조선정부의 병원(朝鮮政府之病院)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정부의 병원 설립 준비

조선 정부에서 병원 설립을 준비할 책임자를 지명한 것은 이 해 2월 중순경이었는데, 책임자는 당시 통리아문(외아문 ; 현재의 외교통상부에 해당) 독판(오늘날의 장관격)으로 있던 김윤식(金允植)이었다. 그는 2월 18일, 미국공사관에 당장 병원 건물로 사용할 수 있는 깨끗한 집 한 채를 마련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 건물은 갑신정변 주역 중의 한 사람이던 홍영식(洪英植)의 집이었는데, 정변 후 국법에 따라 정부 소유로 넘어온 것이었다. 이 집을 병원으로 개조하는 데에는 약 50일 가량이 소요되었다. 이듬해 2월 1일자 한성주보에는 “정월 25일에 통리아문에서 임금의 뜻을 받들어 병원을 재동(齋洞) 서쪽 길가에 창건하고…”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로 보아 병원의 관제 - 당시 용어로는 장정(章程) - 가 공포된 것은 그 해 3월 11일(음력 정월 25일)이었던 듯 하다. 제중원과 마찬가지로 통리아문 소속기관이었던 박문국의 경우 `한성부신문국장정'과 `신문지응행규칙'이 모두 남아 있지만, 제중원에 관해서는 아쉽게도 `규칙'만이 전한다. 병원규칙의 초안은 일본공사관 의사로 있던 카이로세 데시코(海瀨敏行)가 작성했는데, 이 초안을 부분 수정한 `공립의원규칙'이 공포된 것은 그 해 4월 초의 일이었다. 

 광혜원으로 이름 짓다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 - 조선의 관제에서 원(院)은 일반적으로 숙소가 딸린 관서를 의미했다. 또 홍제원(弘濟院)이나 전관원(箭串院) 처럼 공용으로 사용하는 여관도 원(院)이라 했다 - 이라는 뜻의 광혜원이라는 이름은 설치와 관련된 여러 규정이 마련되고 병원이 실제로 개원한 뒤인 4월 12일에 지어졌다. 이 이름은 조선 국초의 제생원(濟生院)이나 두 해 전에 폐지되었던 혜민서(惠民署), 활인서(活人署)와 같은 전통 의료기관의 이름을 계승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4월 14일 의정부는 국왕에게 “혜민서와 활인서가 모두 혁파되어 조정에서 백성에게 시혜하는 뜻이 소홀해져…별도로 병원 하나를 만들어 광혜원이라 칭하였다”고 계(啓)하였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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