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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블루스 – 응급실편
우리들의 블루스 – 응급실편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5.3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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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신속하게 개발된 백신 덕에 정부의 장담대로 온 국민이 이른바 ‘집단면역’을 획득하여 늠름하게 코로나를 극복할 줄 알았다. 적어도 신속한 검사와 물샐틈없는 추적을 주특기로 하는 우리의 ‘K-방역’이 확진자들을 계속 저인망식으로 쓸어 담아 격리함으로써 대다수 국민은 감염으로부터 끝까지 보호되지 않을까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어느 날 폭발적 전염력을 지닌 오미크론 변이가 나타나 대한민국 사람들의 절반 이상을 휩쓸고 지나간 결과 역설적으로 코로나가 주춤해진 지금의 이런 ‘황당 결말’을 처음부터 예상했던 전문가가 과연 몇이나 될까.
  
어쨌거나 우리 병원 역시 이제는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급조했던 음압 격리병동의 구조를 원래대로 돌리고 그곳에서 일하던 인력의 재배치를 고민 중이며 출입 통제도 적정 수준으로 완화하고 있다. 아울러 무엇보다 정성을 쏟고 싶은 일은 지난 2년 반의 코로나 시기를 세세한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 병원 식구들이 코로나로부터 암환자들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 수행했던 일들을 글과 숫자와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뜻을 얼마 전 원내 재난대책본부 회의에서 밝혔더니 응급실 간호사들이 가장 먼저 각자의 경험을 에세이 형식으로 작성해 보내왔다.
  
코로나 사태 초기 캐나다 유학에서 돌아온 한 여학생이 화장실을 가다 넘어져 턱이 찢어졌다. 코로나 확진자도 아닌데 단지 자가격리 기간이 채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근 병원들이 환자치료를 꺼렸다. 결국 노원구 보건소는 이 환자를 공공병원인 우리 병원 응급실로 보냈고 응급실 의사와 간호사는 환자의 상처를 꿰매기 위해 레벨 D 방호복으로 중무장하고 장갑은 무려 3개나 착용해야 했다. 마지막에 낀 멸균 장갑이 자꾸 찢어져서 다시 착용하는 바람에 보통 때면 10분도 안 걸릴 봉합이 무려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고 응급실 10년차 이(李) 간호사는 회상한다. 모두가 극도로 예민했던 코로나 초창기의 경험을 그녀는 후배들에게 으쓱하면서 두고두고 이렇게 이야기할 게 틀림없다. “너, 레벨 D 방호복 입고 창상봉합 해봤어?”
  
응급실 5년차 김(金) 간호사가 근무할 때 미열이 있는 할머니 한 분이 응급실에 오셨다. 동맥혈 산소포화도가 낮아 코로나 검사를 했더니 양성이 나왔다. 환자를 곧 응급실에 딸린 음압격리실로 옮긴 뒤 방호복으로 무장하고 그 방에 들어간 김 간호사가 이것저것 간호업무를 할 때였다. 할머니는 자신의 몸도 제대로 못 가누시면서 김 간호사의 손을 꼭 잡고 힘겹게 한마디 하셨다. “밥은 (먹었나)?” 결국 격리병동으로의 입원이 결정되어 이동용 음압 텐트에 들어가신 할머니는 괜찮은지를 손짓으로 묻는 김 간호사에게 그 안에서 미소와 함께 엄지와 검지로 오케이 표시를 해주셨다. 스쳐 가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의료진과 환자의 관계를 떠나 사람 사이의 따뜻함이 오가는 순간이었다. 김 간호사는 며칠 후 세상을 떠나신 그 할머니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고 잠시 서로 나누었던 그 따뜻함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나는 죽어도 원자력병원에서 죽을 거야”라고 외치며 응급실에 들어오셨던 81세 할아버지는 이전에 심부전으로 우리 병원 중환자실 신세를 지셨던 분이었다. 응급실에서 코로나로 확진되셨는데 본인은 코로나 환자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산소와 함께 항생제, 혈관확장제, 이뇨제 등이 투여되었고 소변량 측정을 위해 소변줄도 삽입되었으나 별안간 섬망 증상을 보인 환자는 산소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정맥 주사와 소변줄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이 환자를 간호하던 응급실 4년 경력의 또 다른 이(李) 간호사는 진정제도 효과가 없자 어쩔 수 없이 보호자를 설득하여 격리실에서 환자가 몸을 움직일 수 없도록 신체 보호대를 착용시키기로 한다. 아버지의 사지가 결박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호자인 아들은 죄송하다 부르짖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그것이 치료목적의 불가피한 조치임을 잘 알면서도 이 간호사 역시 착잡하고 슬픈 심경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응급실 간호사들의 생생한 경험과 소회가 담긴 글을 읽어내려가던 나는 어느새 그들의 감정에 점점 동화되고 있었다. 과거에 겪어보지 못했던 팬데믹이 가져온 공포와 불안, 그러면서도 의료인으로서 가져야 했던 사명감과 책임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리 병원은 코로나 초기에 “지켜야 한다, 막아야 한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는데 그게 아마도 방역 최일선에 있던 응급실 간호사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외부에서 쇄도하는 각종 민원과 문의 전화가 얼마나 큰 스트레스였는지, 코로나 와중에 무리하게 진행했던 응급실 리노베이션은 또 얼마나 직원들을 혼란스럽게 했는지, 그 또한 수간호사와 주임간호사의 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시련들을 치열하게, 그러나 묵묵히 견뎌준 이들의 헌신에 경의를 표한다.
  
요즘 케이블 TV에서 우리 가족이 즐겨보는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차승원, 이병헌, 이정은, 한지민 등등 여러 주인공들이 차례로 각자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옴니버스 형식의 주말드라마다. 작가가 기획 의도라며 홈페이지에 적어놓은 글은 이렇다. “응원받아야 할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때때로 한없이 버거운 것임을 알기에 그 삶 자체를 맘껏 ‘행복하라!’ 응원하고 싶다.”
  
나는 병원 우리 응급실 간호사들이 보내온 글을 읽으면서 마치 <우리들의 블루스> 현실판을 접한 느낌을 받는다. ‘블루스’는 그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서글픔과 우울함이 배어있는 음악 장르다. 하지만 비록 슬픈 감정이 들어있으되 거기엔 희망이 여전히 남아있고 치유의 재료들이 곳곳에 들어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간호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코로나 스토리에는 눈물, 땀, 한숨이 뒤범벅되어 있어 얼핏 힘겹고 고달프게 생각되지만, 직업인으로서 또 의료인으로서의 보람과 기쁨이 곳곳에서 묻어나기에 결국엔 해피엔딩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응급실에 이어 이제 곧 내 손에 들어올 감염격리병동, 호흡기 전담 클리닉, 진단검사의학과 코로나 검사실, 현관 통제소 등등에서 근무했던 분들의 ‘블루스’ 스토리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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