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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그 사내’와의 만남
‘광화문 그 사내’와의 만남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5.2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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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60)

‘그 사내’는 덕수궁 돌담길의 다정한 연인들을 보면서 추억에 잠겨 ‘광화문 연가’를 애틋하게 부르는 가수 이문세를 말하는 게 아니다. 국민과의 격의 없는 소통을 강조하며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지난 대통령 후보들을 말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광화문의 그 사내는 바로 김남조 시인의 남편으로 서울대 미대 교수였던 조각가 김세중이 13개월 동안 동상으로 제작하여 1968년 광화문 광장에 우뚝 세워놓은 충무공 이순신을 말한다.
  
2001년 발간된 김훈의 <칼의 노래>는 충무공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던 때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를 묘사한 소설이다. 김훈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장중한 문장이 독자들을 사로잡아 일약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오른 책이다. 그런데 작가가 출판사에 들이밀었던 최초의 원고에는 <광화문 그 사내>란 제목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어감이 좀 장난스러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출판사 편집국장은 김훈을 설득했고 기어이 제목을 <칼의 노래>로 바꾸어 놓았다. 훨씬 서정적이고 세련된 옷을 입었음에도 못내 아쉬움이 남는 것은 16세기의 고독한 영웅이 ‘광화문 광장’으로 상징되는 현대사의 한복판에 훅 들어와 함께 숨 쉬는 듯한 생동감을 난 원제에서 조금 더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광화문 그 사내’를 공식적으로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고 서울 시내 각 고교에서 5명씩 차출된 남학생들은 여의도 광장에 모여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아산 현충사를 향해 도보 행군을 시작했다.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에 맞추어 현충사에 도착해 참배한 뒤 버스편으로 돌아오는, 서울시의 전통 있는 ‘학도호국단’ 행사였다. 현충사 도착 하루 전날인 그해 4월 27일 오전 우리는 충청도 어느 논밭 사이 국도를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인솔 교사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라디오를 틀었을 때 거기서 흘러나온 뉴스는 순간적으로 모두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훗날 ‘우 순경 사건’이라 불린 엽기적인 총기 난사 사건이 속보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경남 의령에서 만취 상태의 경찰 하나가 4월 26일 밤부터 27일 새벽까지 마을을 돌면서 카빈 소총과 수류탄으로 주민 수십 명을 몰살시킨 뒤 자폭했고 라디오에서는 속속 발견되는 희생자 숫자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고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의령군 궁류면은 당시 우리 외가 친척들이 많이 살던 봉수면과 인접한 곳이라 더욱 충격을 받았다. 이튿날 현충사에서 충무공의 영정과 마주했을 때 난 ‘핀트’가 좀 안 맞지만 이런 질문을 했던 것 같다. “그 옛날 조선의 양민들이 왜군들에게 학살당하는 참상을 목격하시면서 장군께서 느끼셨던 분노가 이랬을까요?”
  
충무공을 두 번째로 만난 것은 해군 군의관 대위로 막 임관했을 때였다. 장소는 남해 통영 앞바다 한산도에 있는 제승당이었다. 해군에서는 충무공을 ‘장군(General)’이 아닌 ‘제독(Admiral)’으로 호칭한다. 전라좌수사에 이어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신 분이니 당연히 해군의 계급 시스템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역사를 꼼꼼히 살피는 분들은 충무공이 오늘날로 치면 육군 초급장교인 ‘권관(權管)’으로 임관하여 함경도에서 근무하셨던 이력이 있기에 ‘장군’ 호칭도 아무 문제 없다고 하지만 해군에서는 엄격하게 ‘이순신 제독’으로 부른다. ‘제독(Admiral)’의 어원을 ‘admire(존경하다)’로 보는 견해도 있으니까 뜻도 훨씬 좋지 않으냐고 말한 해군사관학교 교장도 있었다.
  
그런데 제승당의 이순신 제독에게 참배하러 가는 길에 수치스러운 우리 해군의 역사 한 가지를 듣게 되었다. 해군과 해경 316명을 태우고 제승당에 참배한 뒤 모선으로 돌아가던 예인선이 전복되면서 무려 159명이 사망한 1974년의 사건이다. 갑작스럽게 돌풍이 불었다고 하지만 나중에 정원 초과와 운행 부주의가 사고의 주된 원인으로 밝혀졌다. 세계 해군 역사상 전시가 아닌 평시 사고로는 가장 많은 인명 손실이었다는 그 비극의 현장을 배를 타고 막 지나온 다음, 난 제승당 이순신 제독의 영정 앞에서 또다시 고등학교 때와 비슷한 질문을 던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처구니없는 원균의 리더십으로 인해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당하다시피 한 조선 수군들의 원혼 앞에서 제독께서 느끼셨던 죄책감과 무력감이 이런 것이었을까요?”
  
‘광화문 그 사내’와의 만남의 절정은 그 표현이 비롯된 <칼의 노래>와의 만남이었다. 옛날 현충사와 한산도에서 충무공의 영정을 바라볼 때 중첩되던 다른 사건들로 인해 가뜩이나 이전 만남에도 비장감이 서렸었는데, 작가 본인의 말마따나 ‘휘모리장단 같이 급박한 문체’로 쓰인 <칼의 노래> 속 충무공과의 만남 역시 묵직하면서도 격정적이었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로 시작하는 말 줄임표 가득한 소설 속 마지막 문장, 곧 충무공의 노량해전에서의 마지막 호흡은 때때로 온갖 책임에 힘겨워하던 나의 호흡이 된 것 같아 부르르 몸을 떨기도 했다.
  
이후로 나는 <칼의 노래>의 ‘레퍼런스’라 할 수 있는 <난중일기>를 곁에 두고 틈틈이 읽고 있다. 빠짐없이 적어놓은 날씨, 활쏘기 훈련을 하거나 규율을 어긴 자에게 벌을 내리는 것처럼 병영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 어머니를 비롯하여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염려, 그리고 온갖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본인의 몸 상태. 솔직하고 간결하게 적어 내려간 ‘그 사내’의 기록들은 내가 요즘 부쩍 힘겨워하는 일기 쓰기를 지속할 노하우를 알려준다. 그러다 명량해전과 같은 큰 사건에서 보이는 갑작스럽게 구체적인 묘사는 역사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탁월했던 충무공의 감각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광화문 그 사내’는 그동안 책으로 또 영화와 드라마로 한 번씩 국민적 ‘신드롬’을 일으켜 왔다. 무려 500여 년 전에 살았던 인물이 이런 조명을 받는 건 그의 이야기가 대부분 기록으로 입증되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데서 기인하는 것 아닐까 싶다. 기록을 통한 만남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그 기록이 진솔한 것일 때 만남은 존경과 추앙으로 이어진다. 우리 역사상 ‘성웅(聖雄)’으로 불리는 유일한 인물의 일기에 특별한 관심이 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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