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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의 기쁨
조율의 기쁨
  • 의사신문
  • 승인 2022.05.1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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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피아노는 타악기인가 현악기인가? 서양음악에서 현악기는 바이올린이나 첼로처럼 활을 이용한 마찰로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擦絃樂器)’와, 기타나 하프처럼 손으로 퉁겨서 소리를 내는 ‘발현악기(撥絃樂器)’로 나뉜다. 피아노는 건반을 누를 때 해머가 줄을 때려서 소리를 내니까 굳이 분류하자면 ‘타현악기(打絃樂器)’라 할 수 있다. 일종의 ‘하이브리드’인 셈이다. 한 번씩 이런 퀴즈를 낼 때 사람들은 문자까지 써가며 잘난 척하는 나의 설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이 쓰는 말로 이른바 ‘안물안궁’, 그러니까 ‘물어보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고 본론에 해당하는 질문을 또 한다. 혹시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중대한 차이가 뭔지 아느냐고. 관심 없는 이야기를 자꾸 이어가려는 내게 짜증이 난 어떤 분은 이렇게 대답한다. ‘부숴서 불을 때면 피아노가 바이올린보다 훨씬 오래 탄다’라고. 뭐, 극단적이지만 아주 틀린 얘긴 아니고 귀찮아하는 그 심정 또한 이해 못 할 바 아니나, 어느 날 불현듯 깨달은 ‘순정률’과 ‘평균율’의 차이를 난 자꾸만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고 싶다.
  
어머니가 나를 동네 피아노 학원에 데려간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앞으론 우리나라 남자들도 누구나 악기 한두 개쯤은 다루어야 하고 그러려면 피아노가 기본이라는 어머니의 철학 덕분이었지만 그 원대한 전인교육의 취지를 착실히 살려가기엔 학원 선생님이 너무 무서웠다. ‘체르니’에 입문할 때쯤 결국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난 피아노를 포기했고 바이올린으로 갈아탔다. 다행히 바이올린 선생님은 온화한 성격이셨고 교회에서 학생 성가대 반주하는 앙상블에도 가입하여 바이올린의 재미를 막 느껴보려던 찰나였는데 한 가지 기술적인 부분이 나를 좌절시켰다. 그건 바로 ‘조율’의 어려움이었다.
  
별도의 전문가가 조율하는 피아노와 달리 바이올린은 매번 연주자가 직접 개방현을 두 개씩 동시에 그어가며 그 화음이 소위 ‘완전 5도’를 이루는지 판단함으로써 조율이 이뤄진다. 내게는 이게 참 어려운 작업이어서 항상 선생님께 바이올린 조율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어쩌다 혼자 연습할 때는 나도 듣기 괴로운 불협화음의 도가니 속에서 헤매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설프지만 어찌어찌 바이올린 줄 맞추기 노하우를 간신히 터득하고 났더니 이번엔 피아노와 합주를 할 때 자꾸 ‘삑사리’가 났다. 바이올린끼리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참 희한한 일이었다.
  
높낮이가 서로 다른 음이란 물리학적으로 각 음마다 ‘진동수’, 다른 말로 ‘주파수’가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음의 주파수를 1이라 했을 때 한 옥타브 위인 음의 주파수는 2가 된다. ‘도미솔’, ‘솔시레’, ‘파라도’처럼 듣기 좋은 화음은 주파수의 상대 비율이 4:5:6이다. ‘도’와 ‘솔’이 이루는 화음의 주파수 비는 2:3(완전 5도)이고 ‘도’와 ‘파’가 이루는 화음의 주파수 비는 3:4(완전 4도)다. 이런 식으로 화음에 따라 ‘도레미파솔라시도’의 각 음을 배치하는 방식을 ‘순정률’이라고 한다. 바이올린은 이 순정률 방식을 이용하여 조율을 하는 악기다.
  
반면 피아노는 ‘도레미파솔라시도’ 한 옥타브 사이의 주파수를 균등하게 12등분하여 그 분할된 음정이 각각 정확히 나오도록 건반을 배열하는 방식이다. ‘도’에서 ‘높은 도’ 사이에는 검은 건반을 포함하여 모두 12개의 건반이 들어가 있는데 건반마다 동일한 주파수 간격으로 각 음을 배치하는 방식을 ‘평균율’이라고 한다. 고정된 음을 내야 하는 건반악기의 특성상 이런 방식의 조율이 이뤄져야 하며 순정률과 달리 조옮김이 자유롭다는 특징이 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중대한 차이는 바로 전자는 ‘평균율 악기’고 후자는 ‘순정률 악기’라는 점이다. 둘이 협연을 할 경우, 이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멋진 화음을 만들 수 없다. 피아노는 음이 고정되어 있기에, 동일 음이라 할지라도 미세한 주파수 차이를 손가락으로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바이올린이 피아노에 맞추게 된다. 옛날 바이올린 선생님이 ‘플랫은 더 낮게, 샵은 더 높게 짚으라’ 강조하셨던 이유가 피아노와 이런 조화를 추구하기 위해서였음을 뒤늦게야 알게 됐다. 
  
60년이 훨씬 넘도록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 전당에서 오직 피아노 조율의 한 길만을 걸어온 조율 명장 이종열 선생은 작년 초에 유재석이 진행하는 한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조율을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란 유재석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조율은 타협이에요. ‘도’음 하나를 결정하려면 내가 여기 서도 되는가, 위쪽 4도한테도 물어보고, 5도한테도 물어보고, 또 옥타브한테도 물어봐야 해요. 다 오케이 그래야만 그 음이 그 자리에 서는 거에요. 이게 조금만 어긋나면 화음이 안 맞아요.”
  
당시 한창 순정률과 평균율을 공부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보게 된 이 83세 거장의 소박한 인터뷰는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가수 한영애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잠자는 하늘님’에게 우주적인 스케일의 조율을 요구한다. 시커먼 바닷물과 뿌연 하늘이 옛 모습을 찾도록 이제 그만 일어나서 한방에 세상을 바로잡아 달라고. 하지만 이런 천지개벽 수준의 조율은 어쩌면 조물주의 월권이요 일방적 과시일 뿐, 정작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훨씬 더 필요한 것은 이종열 명장이 말하는 조율, 곧 ‘타협’과 ‘하모니’가 아닐까.
  
병원에서는 거의 매일 어디선가 불협화음이 들려온다. 조율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참으로 고단하다. 바이올린을 처음 배우던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설프게 줄을 풀었다 당겼다 하지만 결과물은 형편없을 때가 많다. 순정률로 바이올린의 네 줄만 화음을 맞추면 되는 건지, 아니면 평균율 악기인 피아노와도 음을 맞춰야 하는 건지 먼저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 아래의 무수한 음들에게 하나하나 물어보며 새로운 음의 자리를 결정한다고 하는 이종열 명장의 작업은 분명히 훨씬 더 고단하겠지만, 까칠하기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머만’마저 극찬하는 멋진 화음을 만들어냈을 때 그의 얼굴에 솟아나는 환한 미소는, ‘조율의 기쁨’ 또한 결코 소소하지 않음을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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