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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서울시의사회 황규석 부회장의 쉽게 쓰는 건보 이야기(4)
[칼럼] 서울시의사회 황규석 부회장의 쉽게 쓰는 건보 이야기(4)
  • 의사신문
  • 승인 2022.05.1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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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석 서울시의사회 총무·법제부회장(옴므앤팜므 성형외과의원 원장)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역사(3)

※우리나라 공보험 제도의 역사는 한 마디로 규제의 강화라는 도전과 자율성을 지키려는 의료계 응전의 역사이다.

쉬운 건보 이야기의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역사 3) 2000년(의약분업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번 시간에는 먼저 2000년 의약분업의 과정에 대해서 되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63년 의약분업이라는 단어가 ‘약사법’에 명시된 이후 1964년부터 이를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의료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지지부진했던 의약분업 갈등은 1999년 7월로 예고된 정부 주도의 의약분업을 연기하기 위한 명분으로 1999년 5월10일 시민단체가 주도한 의약분업 안에 대해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약사회가 전격 합의함으로써 시작됐습니다.(처방전은 ‘성분명 처방’을 권장하되 약품의 상품 이름을 적는 ‘일반명 처방’을 함께 사용하기로 합의, 일반명 처방의 경우 약사가 환자의 동의를 얻어 동일함량, 동일 성분, 동일 제형의 의약품 가운데 다른 상품으로 대체조제 할 수 있도록 함)

이러한 일방적인 합의와 정부의 방침에 의료계가 반발하며, 1999년 11월30일 장충체육관에서 2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올바른 의약분업 쟁취를 위한 범의료계 결의대회’를 개최했고, 12월21일 의원쟁취투쟁위원회(의쟁투)를 결성하여 정부의 의약분업안을 절대 반대키로 했습니다. 

2000년 1월17일 의쟁투는 전면투쟁을 선포하고 2월17일 여의도 문화마당에서 4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잘못된 의약분업 바로잡기 전국의사대회’를 개최하여 대체조제 임의조제 봉쇄장치 마련, 약화사고 책임소재 및 보상대책, 의약분업 시범사업 실시, 진료수가체계 전면 개편을 요구했으나, 정부는 2.17 대회를 이끈 의협, 병협, 의쟁투위원장, 광역시의사회장 6명을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이후 3월29일 김대중 대통령과 만남에서 “의약분업 등의 정책 시행 과정에 의료계의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라는 대답에 집단휴진을 철회했으나, 차흥봉 장관에 의해 그 내용이 번복되며 정부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어 4월2일 의쟁투는 4월4일∼6일(1차 파업) 3일간 전국적인 휴진 및 6월4일 정부과천청사 앞 잔디마당에서 ‘잘못된 의약분업 저지 전국의사 투쟁 결의대회’가 열렸으며, 6월에는 개업 의사는 물론 일부 대학교수까지 파업(2차 파업)에 참여하여 전국적인 의권투쟁이 시작됐습니다. 

2000년 의약분업 당시 정부과천청사 앞 집회 사진. 사진=의협 홍보실 제공

하지만, 정부는 2000년 7월1일 의약분업 제도를 시행하고, 7월 한 달 계도기간으로 정해 운영했는데, 진행된 약사법 개정에서는 의료계의 요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오히려 7월18일 통과된 약사법 개정안은 임의조제, 대체조제를 실질적으로 열어 놓고 의사의 진료권을 제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더욱 거센 의료계의 반발을 일으키게 됐습니다. 

또한 검찰에 의한 의료계 지도부에 대한 처벌이 계속되어 7월4일 김재정 의협 회장이 구속되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되자 7월29일부터는 각 대학병원의 전공의들이 파업을 선도해 대정부 투쟁을 벌였고, 2만여 명의 의대생이 ‘교과서적 진료환경 조성과 올바른 의약분업 실현’을 내걸고 의료계 파업에 동참, 전공의와 함께 투쟁 주도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2000년 의약분업 당시 정부과천청사 앞 집회 사진. 사진=의협 홍보실 제공

2000년 8월11일∼17일(3차 파업) 파업은 기존의 전공의 파업 및 전임의들도 파업에 참여하고 개원의와 전체 의대 교수들도 동참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의료계 투쟁이 확산되는 상황에 직면했고, 2000년 8월31일 서울 대방동 보라매공원에서는 태풍 ‘프라피룬’을 온몸으로 맞서며 4만 여 명이 참석한 ‘참 의료 실현을 위한 전국의사·학생 결의대회’가 개최됐습니다. 

그러한 의료계의 거센 저항에도 정부의 성의 있는 답변이 없자 9월5일부터 대학교수들이 외래진료를 중단했으며, 9월15일∼17일, 4차 파업이 강행됐습니다.(이후 10월4일 의대생 대부분이 자퇴서를 제출하고 의대 본과 4학년 3081명 중 62명을 제외한 3019명이 의사 국가고시를 거부함으로써 명실공히 전 의료계가 하나 된 모습으로 정부에 맞선 최초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9월21일 김대중 대통령이 “정부가 의약분업에 대해 조금 안이한 판단을 한 것이 아니냐는 반성을 하고 있다”라며 의료계 전반의 문제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나타냄으로써 의료계와 정부의 대화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됐고, 9월25일 정부는 그간 일련의 의료파업사태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힘으로써 의료계에서도 이를 수용하여 9월28일 의료계와 정부 간의 공식 대화가 시작됐으나, 의료계의 관련 공무원들에 대한 문책 요구로 다시 중단된 후 10월6일∼10일(5차 파업) 5일간의 총파업 이후, 10월24일 의정협의에서 1) ‘의·약·정 협의회’에서 논의하여 약사법 개정추진, 2) 의료전달체계 확립, 3) 의료보험 국고지원, 4) 의과대학 질 향상, 5) 대통령 직속 ‘의료제도개혁특별위원회’에서 중장기 계획을 논의하기로 합의했으며, 11월10일 보건복지부, 의협, 약사회는 약사법 개정과 관련된 12개 항목의 쟁점에 합의했고, 12월28일 의협이 최종 결과에 서명함으로써 1년여 간의 2000년 의약분업 투쟁은 끝이 나게 됐습니다.

이러한 2000년 의약분업 투쟁은 준비되지 않은 의약분업 강행에 대한 정부의 사과를 얻어냈고, 의약품 재분류, 대체조제의 원칙적 불가, 건보재정에 대한 국고지원확대 약속,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추진위원회 구성 등의 구체적인 성과 이외에 최초로 개원가 교수, 전공의, 의대생까지 의사들의 전 직역을 아우르는 최초의 투쟁이었으며, 전체 의사들이 정부와 언론,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기존의 의협 집행부와 정부의 합의에 의해서 결정되던 의료제도에 의사 모두가 관심을 갖고 참여 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고, 특히 2000년 의권투쟁으로 자각하게 된 젊은 의사들이 의사협회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의협 정관 개정을 통해 의협 회장의 직선제 선거를 도입하게 됐고, 의료정책 최고위과정 개설과 의료정책연구소 설치와 같은 의협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으나 의사사회 내부의 분열 등 대한민국 의료계의 불행한 역사가 시작되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후 정부는 2001년 6월 16일 의료기관을 철저하게 국가의 통제 하에 두고 의사를 노예화하려는 희대의 악법인 ‘국민건강보험 재정 안정화 특별법안’과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 대책’을 발의하며 의사들을 옥죄기 위한 시도들이 시작됐습니다. 다음 편에는 이러한 의사들을 옥죄는 여러 가지 시도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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