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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獨裁)가 용서될 때
독재(獨裁)가 용서될 때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5.03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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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58)

의대 교수, 개원의, 봉직의에서부터 기초의학을 전공한 의과학자에 이르기까지 의사들 130여 명이 들어와 있는 SNS 단체대화방이 있다. 자기가 직접 환자를 보다가 궁금한 점이 생겼을 때, 혹은 누군가에게 본인 전공 분야 이외의 난처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걸 그대로 이 방에 후다닥 올리면 어디선가 전문가가 척 등장해서 적절한 답을 해 준다. 
  
“55세 여자 환자가 갑상선 유두암으로 곧 수술 예정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담석이 발견됐어요. 어느 것부터 수술해야 하나요? 또 두 수술 사이의 기간은 얼마나 두어야 하는지요?” 정형외과 개원의가 친구 부인의 사례라면서 질문을 올리면 대학병원의 외과 교수가 나서서 이렇게 조언해준다. “증상 있는 것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요즘은 둘 다 내시경이나 로봇으로 할 수 있으니 2주 정도 간격을 두면 충분할 듯합니다. 담석부터 빨리 제거하라고 하세요.”
  
이보다 더욱 흔하게 오가는 대화는 질병별 전문가 추천이다. “가까운 분이 ‘다계통위축(multiple systemic atrophy)’이란 진단을 받았어요. 누구한테 가야 하나요?” 그러면 금세 서울대병원 김모 교수, 전모 교수를 비롯하여, 세브란스 이모, 삼성서울병원 조모 등등 해당 분야 전문가인 신경과 의사들의 이름이 주르륵 추천된다. 단순히 언론에 자주 나와 이름만 높은 의사들이 아니라 그들의 진료 역량과 태도를 직접 옆에서 보고 느끼는 동료 의사들의 추천이기에 믿음이 간다. 
  
이런 종류의 질의응답은 대개 존댓말로 오가지만 가끔은 허물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다정한 반말의 설명이 등장하기도 한다. “응, 서정아! 여성은 미녹시딜 1/4정부터 복용하고 반년가량 지켜보면서 1/2정까지 증량 가능해. 처음엔 어지러울 수 있는데 대부분 괜찮아. 난 저혈압이지만 먹는단다.” 여성 탈모에 미녹시딜을 얼마나 쓰는지 묻는 한 여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자기 경험까지 보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또 다른 여선생님. 그는 본인의 전문 분야인 각종 건강기능식품에 대한 부가적 설명까지 잊지 않는다.
  
입학정원 200명으로 시작했던 의과대학 우리 동기들 이야기다. 졸업할 때는 위 학번들이 일부 내려와 좀 섞였지만, 그들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모두 각별한 우정을 자랑하는 것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소통이 끊이지 않았던 결과다. 그렇게 된 배후에는 동기 회장님의 남다른 수고가 있었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언제부터 모임이 시작됐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졸업한 지 30년이 훌쩍 더 지난 지금까지 우리 동기는 단 한 명의 회장이 동기회 모임을 이끌고 있다. 아마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분이 종신직 회장을 하리란 의견에 토를 다는 사람이 없다.
  
고대 로마에는 ‘집정관(執政官)’이라 불리는 최고의 정치지도자들이 있었다. 매년 투표로 2명을 뽑아 한 달씩 교대로 업무를 보도록 했으며 임기는 1년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외적이 침략할 때처럼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을 최장 6개월간 ‘독재관(獨裁官)’으로 임명한 뒤 전권을 주어 위기를 극복하도록 했다. 태생이 ‘기간제 임시직’이었던 독재관 자리를 졸지에 ‘종신제 정규직’으로 바꾼 사람이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흔히 ‘씨저’로 불리는 인물이다.
  
나름 합리성을 띠고서 탄생했던 정치 제도가 개인의 불순한 욕심이 개입됨으로 인하여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악명을 떨치게 된 시스템, ‘독재(獨裁)’. 한자의 뜻처럼 ‘혼자서(獨) 옷감 가위질하듯(裁)’ 한 국가를 제 맘대로 쥐락펴락하는 독재자들은 당연히 지탄의 대상이다. 하지만 30여 년을 홀로이 집권하고 있는 우리의 동기회장님은 오랜 기간 모든 일을 거의 혼자서 추진한다는 면에서 독재자들의 사례를 따르고 있으나 오히려 지탄이 아닌 칭송을 받고 있다. 독재의 에너지가 ‘야욕’이 아닌 ‘헌신’이기 때문이다.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온라인 단체대화방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하곤 한다. 정치적이나 종교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강한 어조로 말하는 자가 나타나고 그게 언쟁으로 번지면서 상처받고 떠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의 회장님은 생업인 외과의원보다 이 대화방 관리에 훨씬 정성을 쏟는 듯하다. 혹시라도 서로의 마음을 다치게 할 위험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주제가 등장하면 세련되게 화제를 돌리는 방식으로 예방조치를 취하기에 이제는 대화방에 자체 정화 능력이 생겼다. 어설픈 논쟁은 사라지고 각종 경조사에 대한 진심 어린 축하와 위로만이 넘쳐난다. 게다가 AI 로봇 왓슨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의료계 전문가들의 집단지성이 바로 곁에서 온갖 자문에 응해주니 얼마나 마음 든든한지.
  
코로나 감염 상황이 나아지면서 우리 회장님은 동기회의 각종 오프라인 모임 준비로 더욱 바빠질 전망이다. 햇살이 따사로웠던 오월의 첫 휴일에 동기들 열여섯 명이 모여 춘천에서 골프 모임을 가진 게 그 시작이다. 강원대학교 병원 친구들이 골프장을 예약하고 밥도 샀지만 모든 일정을 총괄 기획하고 하나하나 챙긴 건 역시 회장님이었다. 본인 병원의 차를 포함하여 승합차 세 대를 빌려와 참석자들을 일일이 집 앞에서 픽업하는 신비로운 스케쥴을 짰고, 이것저것 고려하여 조편성도 세심하게 했으며, 와인 전문가답게 점심식사 때 마실 와인도 꼼꼼히 챙겼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을 자기 마음대로 했지만, 본인의 수고와 희생, 그리고 헌신이 전제되는 독재였기에 모두에게 ‘쿨’하게 용서가 됐다. 아니 슬며시 감사가 우러났다.
  
SNS 대화방 알림음 설정 기능이라는 게 있다. 요즘은 단체대화방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지라 알림음만 들으면 어느 그룹인지 알 수 있어 편리하다. 나는 우리 의대 동기 대화방 알림음을 ‘꼰대’로 해두었다. ‘딩동’이나 ‘띠리링’ 대신 사람 목소리로 심각하게 ‘꼰! 대!’라는 소리가 나온다. 내가 글을 올리는 일은 드물지만 오늘도 빗발치는 휴대폰의 ‘꼰대’ 소리에 내용을 안 들여다봐도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아, 누군가가 또 큰 상을 받아서 축하 메시지가 폭주하는구나’, 혹은 ‘누가 이번에 병원장이나, 학회 이사장이 됐나 보다’ 등등의 생각이 들면서 부디 우리 회장님의 독재가 오래오래 계속되길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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