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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 CCTV법에 대한 대법원 ‘족보’의 출현
수술실 CCTV법에 대한 대법원 ‘족보’의 출현
  • 전성훈 변호사
  • 승인 2022.05.03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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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51)

필자의 대학생 시절, 학부에 ‘파산법’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그런데 이 과목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는 각각 1문제씩 출제되는데(!), 문제가 10년간 동일하다고 했다(!!). 게다가 출석 체크도 안 한다고 했다(!!!).

그래서 위 과목은 언제나 인기과목이었다. 그럼에도 평소 수업시간에는 한산했는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볼 때에는 경악할 만한 인원이 초대형 강의실을 빼곡히 채웠다. 필자 역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포함하여 몇 번 출석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잘 준비하여 답안을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성적은 기대에 못 미쳤다. 그래서 문제가 공개된 시험, 즉 내가 잘 써도 남들이 더 잘 쓰는 시험의 무서움을 체험한 기억이 있다.

이렇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시험 문제는 시험장에서 공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시험을 치를 때에는 언제나 ‘불의타’를 맞을 위험이 있다. 그래서 대학가를 비롯하여 모든 교육기관의 학생들 사이에서는 ‘족보’라는 것이 돌아다닌다. 방대한 시험범위와 무지막지한 학습량으로 고통받는 의대생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법률의 입법도 그렇다. 가령 가상화폐 관련 법률처럼 새로운 문물을 반영하여 내용이 새롭게 창작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극히 일부이고, 선행 입법된 다른 법률을 ‘족보’ 삼아 베껴서 입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법률의 해석인 법원 판결도 그렇다. 처음 접하는 유형의 사건이 배당되면, 판사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법원 아카이브에서 유사 사건의 ‘족보’를 검색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족보’는 학생에게나 실무가에게나, 국회에서나 법원에서나 후학들에게 강력한 지침으로 기능한다.

작년에 의료계는 ‘수술실 CCTV법’으로 큰 홍역을 치른 바 있다. CCTV가 새로운 문물은 아니기에, 이 법 역시 기존 법률인 ‘영유아보육법’을 ‘족보’ 삼아 베껴온 것이다. 영유아보육법은 어린이집 운영자(=CCTV 관리자)에게 ‘영상정보가 분실.도난.유출.변조 또는 훼손되지 않도록 안전성 확보조치를 해야 할 의무’를 부과하고, ‘안전성 확보조치를 하지 않아 영상정보를 분실.도난.유출.변조 또는 훼손당한 자’를 처벌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규정과 처벌규정은 그 주체만 ‘어린이집 운영자’에서 ‘의료기관의 장’으로 변경되어 수술실 CCTV법에 그대로 차용되었다.

그런데 이런 ‘어린이집’ CCTV 관리자의 의무에 대해 최근 대법원이 명확한 판결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 판결은 향후 ‘수술실’ CCTV 관리자에 대하여도 ‘족보’가 될 것이다. 아래에서 대법원 판결의 내용과 그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A는 울산에 있는 공공형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A는 위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는 B의 부모로부터 ‘담임교사 C가 B를 방치한 것 같으니 CCTV 녹화내용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런데 A는 이런 요구를 받은 지 4일 후에 수리업자 D로 하여금 영상정보가 저장되어 있는 CCTV의 저장장치를 교체하도록 했다.

예상되는 바와 같이, B의 부모는 A를 고소했다. 그리고 검사는 ‘A는 C의 방치행위가 드러나서 공공형 어린이집 지정이 취소될까 두려워, ‘영상정보가 훼손되지 않도록 안전성 확보조치를 해야 할 의무를 위반하여’ 교체 전 영상정보가 기록되어 있는 저장장치를 교체 후 숨겨놓아 영상정보를 훼손되게 하였다’는 공소사실로 A를 기소했다.

재판에서는 ‘영유아보육법 규정은 “영상정보를 훼손당한 자”를 처벌하고 있는데, 여기에 ‘영상정보를 스스로 훼손한 자’가 포함되느냐’가 쟁점이 되었다. 제1심은 문리해석상 “훼손당한 자”에 ‘스스로 훼손한 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A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항소심은 “영상정보를 훼손당한 자”란 “영상정보가 훼손되지 아니하도록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아니한 자”를 뜻한다고 보아 A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3년간의 심리 끝에 “훼손당한 자”에 ‘스스로 훼손한 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아 무죄 취지로 항소심 판결을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은 ① 죄형법정주의 원칙상 확장해석금지 원칙에 따라 형벌법규를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확장해석해서는 안 되고, ② ‘당한 자’라는 개념에 ‘한 자’가 포함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문리해석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며, ③ ‘개인정보보호법’은 ‘정당한 권한 없이 또는 초과하여 다른 사람의 개인정보를 훼손하거나 한 자’를 형사처벌하는 규정을 별도로 두고 있는 반면, 영유아보육법은 CCTV를 설치하지 않은 자에게 과태료만 규정하고 있고 형사처벌 규정은 두고 있지 않으므로, 영유아보육법은 ‘스스로 훼손한 자’를 형사처벌하려는 취지가 아니라고 판시했다.

즉 대법원의 입장은, CCTV를 아예 설치하지 않아도 과태료일 뿐인데, 설치 후 촬영된 영상정보를 삭제했다고 하여 형사처벌하는 것은 형평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비록 의도가 의심스럽다 해도, 아무리 법원이라 해도,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작년에 수많은 논란 끝에 수술실 CCTV법이 입법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의료인의 촬영 거부 사유’는 보건복지부령에 위임되었다. 그래서 의협은 발 빠르게 하위법령 개정에 대응하기 위한 TF를 구성했다. 대학병원 교수진, 병원급 대표원장 등을 TF 위원으로 위촉했는데, 이는 당연히 수술 현장의 최일선에 있는 의료인들의 요구사항을 정부에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하위법령의 내용은 상위법의 합리적 해석 범위 내에 있어야 한다. 정부는 의료인이 부당하게 인권을 침해받거나 정당한 의료적 판단을 이유로 형사처벌을 받을 우려가 없도록, 영유아보육법, 즉 수술실 CCTV법에 대한 대법원의 위와 같은 해석을 고려하여 최대한 전향적으로 하위법령을 개정해야 한다. 수술실 CCTV법 시행까지는 1년 이상 남아 있으므로, 의료계와 정부가 충분한 논의를 거쳐 입법 취지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의료인에 대한 인권침해나 진료위축을 막을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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