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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취급주의
마음 취급주의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4.26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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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57)

한 남자가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 미남인데다 멋진 목소리로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그 남자에게 친구의 아내가 물었다. 혹시 악기도 다룰 줄 아느냐고. 그 남자는 한참 망설이다 대답하기를, 전에 바이올린을 연주했으나 지금은 안 한다고 했다. 궁금해진 친구의 아내가 바이올린을 그만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실은 결혼 당시 제 아내에게 바이올린을 켜준 적이 있었죠. 연주를 듣고 난 아내가, 자기는 바이올린을 정말 잘하는 사람을 몇 안다고 말하더군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지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전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바이올린을 다시 잡은 적이 없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친구의 아내’는 소설 <빙점(氷點)>을 쓴 작가 ‘미우라 아야코’다. 그녀는 이때의 경험을 <울리지 않는 바이올린>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수필로 소개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존재인지를 실감 나게 묘사했다. 모름지기 가족이라면 서로의 마음속에 한두 개씩 숨기고 있을지 모르는 ‘울리지 않는 바이올린’을 찾아내어 그게 다시 자연스레 울리게끔 따뜻한 말로 격려해야 하지 않겠느냐 제안하면서.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이 있었다. 기내식으로 제공된 음식을 먹으려다가 거기서 커다란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는 걸 발견했다. 그는 집에 돌아온 다음 그 항공사 사장에게 분노에 찬 편지를 보냈다. 한바탕 화를 쏟아내고는 잊고 있었는데 불과 며칠 뒤 항공사 사장으로부터 그에게 다음과 같은 정중한 사과의 편지가 속달로 도착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일단 그 비행기는 의자를 뜯어내고 완전히 소독했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날 음식을 제공했던 승무원은 징계를 받았고 어쩌면 해고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다면 그 비행기 자체도 운행이 정지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는 없을 거라 확언하오니 앞으로도 저희 비행기를 계속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항공사 사장의 사과 편지에 그 사람은 매우 감명을 받았다. 심지어 해당 승무원에게는 미안한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편지를 세심하게 살펴보다가 편지지 뒤에서 실수로 지우지 못한 것 같은 사장의 노트를 발견했다. ‘바퀴벌레 문제에 관한 일반적인 사과문으로 답장하시오.’
  
데이빗 씨맨즈 목사님의 책, <상한 감정의 치유>에 나오는 에피소드 한 토막이다. 저자는 정서적인 문제로 갈등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마치 위의 ‘바퀴벌레 사과문’처럼 얼마나 정형화된 문장으로 무성의하게 대답해주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심각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가볍고 쉬운 해답을 던져줌으로써 오히려 그들을 더욱 깊은 실망으로 인도하는 건 아닌지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감동에 겨워하다가 이내 바퀴벌레 사과문의 진실을 알게 된 사람의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지고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할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혹시라도 나의 말과 글을 통해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을까 늘 조심스러웠다. 병원에서 회의할 때 행여 내 생각을 좀 강하게 말하거나, 전자 결재 시스템을 통해 올라 온 문서에 몇 가지 코멘트를 남기면 그걸 적지 않은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건을 포장한 박스에 붙이는 여러 형태의 ‘취급주의’ 스티커처럼,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깨진 유리잔으로 묘사되는 ‘파손주의(Fragile)’ 스티커나, 네모 박스를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 쥔 ‘던지지 말 것(Handle with Care)’ 같은 스티커를 붙이고 있음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서초동에 사는 내가 여러 한강 다리 중 이래저래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곳은 반포대교다. 반포대교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다 보면 다리 끝에서 신호등을 만난다. 좌회전 신호가 들어오면 송파 방향의 올림픽 대로로 진입할 수 있다. 직진을 해야 하는 나는 좌회전 신호가 나기 전에 얼른 거길 지나치려고 파란불에 속도를 높이는 경우가 많았다. 휘리릭 지날 때마다 매번 파란불이 끝까지 켜져 있음이 고마웠고 정지 신호에 걸리지 않는 작은 행운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의 신호등은 언제나 파란불이 들어와 있고 시간 맞춰 좌회전 신호만 한 번씩 더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그간 감사하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마음은 그런 것이다. 상처받기도 쉽지만 간사하기도 이를 데 없다. 평소에 운이 좋았다고, 참 감사한 일이라고 기뻐하던 것들이, 어느 날 ‘원래부터 당연한 내 것’이라고 여겨지면서 사람들은 뻔뻔스러워진다. 하지만 그렇다면 반대로 일상의 당연한 것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을수록 우리 삶은 풍성하고 행복해질 게 분명하다. 박스에 붙이는 취급주의 표식 중에 위, 아래를 뒤집으면 안 된다는 스티커가 있다. 대개 위쪽을 가리키는 두 개의 화살표로 표시되고 ‘상하주의(This Side Up)’란 글씨가 적혀있다. ‘감사함’을 ‘당연함’으로 바꾸면 안 된다는, 또 하나의 ‘마음 취급주의’ 표식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8인조 여성 아이돌 그룹 ‘러블리즈(Lovelyz)’는 가수 겸 작곡가 윤상이 프로듀싱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이하게도 멤버 8명 모두가 다 노래를 잘하는데 이들이 2016년에 발표한 노래 중 <마음>이란 사랑스러운 곡이 있음을 최근에 알게 됐다. 전체적으로는 사랑에 빠진 연인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지만, 괄호 속에 부제로 ‘(*취급주의)’란 말이 붙은 데서 보듯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또한 가사 곳곳에 담겨 있다. 상큼하고 발랄한 아이돌의 노래를 들으면서 마음을 한번 즐겁게 정화시켜 볼 것을 권한다.
  
‘여기 내 마음이 있어요 / 좀 더 조심해줘요 / 유리같이 섬세한 거니까’, ‘자주 혼자 두지 말아요 / 외로움을 타니까 / 잃어버리지도 말아요 / 그럼 난 사라져 버릴 테니’, ‘쉽게 안심하면 안 돼요 / 나의 마음이란 건 / 날씨같이 변할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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