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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흥신소
첫사랑 흥신소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4.19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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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56)

지금은 탐정사무소나 심부름센터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과거부터 사용되던 ‘흥신소(興信所)’란 단어는 일단 그 한자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부흥(復興), 진흥(振興), 흥분(興奮) 등의 용례에서 보듯이 ‘흥(興)’은 동사로 쓰일 때 ‘일어나다’, 혹은 ‘일으키다’란 뜻이다. 그리고 ‘뭔가를 일으켜 세웠더니 그 아래에 숨겨졌던 게 나오더라’ 하는 의미에서 ‘찾다, 조사하다’란 뜻으로까지 어의가 확대되어 쓰이는 거의 유일한 경우가 ‘흥신소’의 ‘흥’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흥신소는 ‘개인의 신용(信用)을 비롯하여 각종 비밀스러운 정보들을 조사하는 곳’이라고 풀이하면 될 것이다.
  
<첫사랑 흥신소>란 간판을 발견한 곳은 뜻밖에도 병원 근처에 있는 세차장이었다. 우리 과 동료 선생님이 자기 차가 간밤에 ‘새똥 테러’를 당했다며 오전 내내 투덜거리다가 세차장에 차를 맡길 동안 함께 점심이나 먹자고 해서 나온 참이었다. 간단히 밥을 먹고 세차장이 빤히 바라보이는 길 건너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세차가 끝나길 기다릴 때였다. 고압 살수기로 뒷유리창에 들러붙은 새똥을 떼어내려 세차장 직원이 기를 쓰는데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워낙 그 마을 새 떼가 시전(示展)한 ‘폭풍설사’의 범위와 강도가 무지막지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간신히 세차를 마치고 입이 댓 발 나온 그 직원에게 동료 선생님이 세차비를 건네는 순간 문득 세차장 한가운데 붙어있는 <첫사랑 흥신소>란 멋진 간판이 내 눈에 들어왔다. ‘세차장이 흥신소를 겸업할 리는 없고, 도대체 이건 뭐지?’ 궁금증을 못 참고 나는 직원에게 간판의 정체가 뭔지 물어보았다. 신기하게도 내 질문에 알바생인지 정식 직원인지 모를 그 젊은 청년은 직전의 짜증스러웠던 표정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면서 말이 많아졌다. 자기가 저녁에 뮤지컬과 연기를 배우고 있는데 형편이 비슷한 아마추어 직장인들이 모여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던 작품 제목이 <첫사랑 흥신소>라고 했다. 아마 그때의 행복한 기억을 두고두고 간직하려고 만든 기념품이었나 보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듯 새똥으로 인한 고난은 금세 기억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병원에 돌아와서는 세차장 청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던 <첫사랑 흥신소>의 내용이 몹시 궁금해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마추어 동호회의 작품이라 그런지 인터넷에서는 자료를 구할 수가 없었다. 대신 이것저것 검색을 하다 보니 배우 공유와 임수정이 주연을 맡았던 2010년 영화 <김종욱 찾기>와 비슷한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늦게 나는 그 영화를 기어이 찾아냈고 졸면서도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끝까지 다 보고야 말았다.
  
영화는 다소 고리타분한 성격의 남자주인공 한기준(공유)이 어느 날 잘 다니던 여행사에서 잘리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여행상품을 팔려면 고객에게 어떻게든 그 상품의 장점을 홍보하고 때때로 과장도 심심찮게 보태야 할 텐데 그는 오히려 테러나 쓰나미 같은 현지의 위험성을 솔직하게 다 설명하다 보니 점장의 눈 밖에 난 것이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창업을 하게 되는 한기준의 새로운 창업 아이템이 바로 1인 기업인 ‘첫사랑 찾기 사무소’였다.
  
뮤지컬 공연장에서 무대 감독으로 일하는 서지우(임수정)는 아버지가 소개해 준 비행기 기장의 청혼을 거절한다. 이유는 옛날 홀로 떠난 인도 여행에서 만난 첫사랑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화가 난 아버지는 마침내 딸을 데리고 한기준의 ‘첫사랑 찾기 사무소’를 방문하여 딸의 앞길을 망치고 있는 그 녀석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서지우가 기억하는 것은 첫사랑의 이름이 ‘김종욱’이었다는 것과 인도행 비행기에서 만났던 그의 옆모습 턱선이 외로워 보였다는 것 정도다.
  
로맨틱 코미디답게 남녀주인공은 티격태격하면서 전국에 산재한 수천 명의 ‘김종욱’을 함께 찾아다니는데 그 과정에서 이내 서로 친밀감과 호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마침내 진짜 김종욱을 찾았음에도 그 순간은 찰나의 무의미한 몇 마디 대화로 끝나 버리고, 한기준, 서지우의 새로운 사랑이 시작된다는 결말은 영화 중간쯤부터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비록 뻔한 스토리라고 해도 두어 시간 즐겁게 집중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 ‘첫사랑’이란 단어가 주는 아련한 감성의 힘 때문이 아닐까.
  
최근 우리 병원에서는 ‘바람직한 직장 문화를 만들어 가자’란 취지로 태스크포스팀 하나가 구성됐다. 직원들이 직종을 불문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자유토론을 하는 형태다. 병원장으로서 이 모임에 거는 기대가 크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팀까지 만들어져야만 했던 배경이 좀 유감스럽다. 인력이 늘어나고 조직이 복잡해지다 보니 서로서로 힘을 합쳐 시너지를 내는 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점점 부서 간 담장을 높이면서 일이 잘 안 될 때 남 탓을 하는 분위기가 어느새 위험수위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남들은 맨날 놀고 있는데 나만 항상 혹사당한다’는 식의 피해의식 또한 스멀스멀 자라나지 않겠는가. 
  
나는 이 타이밍에 우리 직원들 모두에게 ‘첫사랑’을 한번 떠올려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남녀 관계뿐만 아니라 직장 또한 누구에게나 첫사랑처럼 다가왔던 시절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첫 출근을 해서 내 책상에 앉았을 때, 처음 사번과 사원증을 받아 그 아이디로 직장 컴퓨터에 로그인을 했을 때, 여기저기 부서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첫인사를 하던 때 등등 출근하면 왠지 설래임이 있었고 뭔지 모를 뿌듯함과 약간의 흥분이 있었던 때가 바로 회사가 내 첫사랑으로 다가왔던 시절이다.
  
나는 첫사랑은 찾는 게 아니고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옛날 그 상태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첫사랑의 상대는 김종욱처럼 비록 찾아내더라도 실망하기 마련이다. 상대가 변함없이 그대로라 하지만 흘러간 세월과 함께 내가 이토록 변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오히려 첫사랑에 가슴 뛰던 시절의 자기 모습을 기억해내고 그것부터 회복하는 게 바람직한 첫사랑 찾기의 시작 아닐까. 혹시 내가 <첫사랑 흥신소>를 창업하게 된다면 활용하고 싶은 영업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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