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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책
죽은 이들의 책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4.12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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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55)

공사판에서 흔히 보는 벽돌의 표준 두께는 57mm라고 한다. 그래서 두께가 대략 5cm 이상 되는 두꺼운 책을 ‘벽돌책’이라 일컫는다. 민음사에서 전체 5권으로 번역한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 <레미제라블>은 총 분량이 2,500쪽이 넘으니 한 권당 평균 500쪽에 이르는 대표적인 벽돌책이다. 어린 시절 그림책으로 처음 접한 ‘장발장’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 뮤지컬과 영화로 진지하게 감상한 스토리조차 겨우 빙산의 일각이었던 셈이다. 외국에서도 이 방대한 <레미제라블>의 원판 소설을 ‘벽돌(The Brick)’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니, 국내외를 막론하고 두꺼운 책들은 누군가를 한 대 칠 수도 있을 법한 흉기의 포스를 풍기나 보다.
  
병원 내 방의 책장에도 벽돌책이 한 권 꽂혀 있다. 2019년 미국에서 출판한 책을 한국인 7명이 번역한 것으로 총 720쪽짜리다. ‘이 페이지를 열면 당신은 사자(死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책의 제목은 <뉴욕 타임스 부고 모음집>이다. 영어판의 원제목은 <Book of the Dead>, 그러니까 <죽은 이들의 책>으로 직역할 수 있겠다. 1851년부터 2016년까지 뉴욕 타임스에 실렸던 유명인들의 부고 기사를 모은 책으로 정치, 문화, 예술, 과학, 철학 등의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죽음을 전하면서 그들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돌아본다. 짧게 요약된 죽은 이들의 인생은, 그가 위인이건 악인이건 간에 가끔 묵직한 돌멩이로 정수리를 한 대 때리는 듯한 삶의 자극을 주기에 난 이 벽돌책을 종종 펼쳐본다.
  
부고 기사는 시작 부분에서 일단 그들의 삶과 죽음을 한두 마디로 정리하고 들어간다.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두 번의 아카데미상 수상자이자 길게 내뿜는 담배 연기와 혼을 쏙 빼놓는 독설로 할리우드를 풍미했던 베티 데이비스가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백인 소수 통치에서 남아공을 해방시키고 첫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존엄성과 관용의 국제적 상징이 된 넬슨 만델라가 95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지난 토요일 심장마비로 사망한 김정일은 굶주리고 고립된 북한을 핵무장하여 더 완벽한 독재정치를 펼치려 했던 장본인이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죽은 이들의 책’은 ‘죽은 유명인들의 책’이라 할 수 있다. 뉴욕 타임스에서 부고 기사로 다룰 정도의 유명인이라면 당연히 그들의 삶 속에는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대중의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흥미로운 사건들이 많이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남들 보기에 밋밋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다가 갔다고 하여 그 인생의 가치와 의미가 유명인들에 비해 한참 모자란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내게는 나보다 나이가 열다섯 살 많은 고종사촌 형님이 한 분 계신다. 특별한 준비 없이 젊은 시절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와 고생을 많이 하셨다. 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서울 생활에 안착할 수 있었던 큰 이유는 바로 지혜롭고 헌신적인 아내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골교회 목사님의 딸로 태어난 고종사촌 형수님은 검소함이 몸에 밴 분이셨다. 하지만 형님의 사업이 자리를 잡을 동안 절약만으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신 형수님은 부업 삼아 신촌 연대 앞에서 작은 만화 가게를 오픈하셨다. 내가 이현세의 야구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독파한 곳도 바로 거기였다.
  
친절하고 인상 좋은 형수님 덕에 만화 가게에는 단골들로 늘 북적였다. 손님 중엔 머리 식히러 잠시 나왔다는 연세대 의대생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몇몇은 훗날 세브란스 교수가 되었다. 형수님은 나중에 세브란스 병원에 어쩌다 검진이라도 받으러 가면 옛날 만화 가게 단골이었던 교수들이 어찌나 살갑게 잘해주는지 참 고맙다고 하시면서도 만화를 그렇게 많이 보았으면서 어떻게 교수가 됐는지 모르겠다고 신기해하셨다.
  
누구보다 선량하고, 누구보다 알뜰하게 주변 사람들을 챙기던 형수님께 불행이 닥친 건 큰 딸아이가 둘째를 해산할 때였다. 명확하진 않지만 ‘양수색전증’이 의심되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딸아이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망연자실 하염없이 슬퍼하던 가족들을 달래고, 엄마 없이 태어난 둘째 외손주를 거두어 철이 들 때까지 보살펴주신 분 또한 모두 외유내강의 형수님이었다. 나는 이 가정에 이제 더는 눈물이 없고 그저 행복한 웃음만이 넘치기를 기도했다.
  
지난해 10월 말경 형수님은 소화가 잘 안 된다고 병원을 찾았다가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으셨다. 그 상태가 되도록 형수님은 당신의 몸보다 아버지 돌아가시고서 홀로 되신 우리 어머니 건강에 더 신경을 쓰고 계셨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미역국이며 전복죽이며 손수 만든 반찬을 들고 오셨고 허리가 불편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동네 둘레길 산책도 자주 하셨던 형수님. 주위 사람들을 늘 먼저 배려하셨던 형수님은 암 세포에게조차 모질지 못하셨나 보다.
  
항암 치료를 아홉 차례 시도했지만 결국 차오르는 복수와 높아지는 빌리루빈 수치를 감당하지 못한 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 어느 봄날 형수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진단받은 지 6개월이 채 못 되는 시간이었다. 나는 마지막 순간이 도래하기 전에 다른 병원에 입원 중이던 형수님을 우리 병원 호스피스로 모시고 싶었다. 호스피스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러워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마침 그쪽 병원에서 추천했다며 형님이 먼저 원자력병원 호스피스에 오고 싶어 하셨다. 짧은 시간이나마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최상의 돌봄서비스를 제공해드리고 싶었지만 형수님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 전원(轉院) 자체가 불가능해졌던 게 못내 아쉽다.
  
‘당신은 어떤 문장으로 남고 싶나요’라고 묻는 <죽은 이들의 책>은 뉴욕 타임스에서 발간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뉴욕 타임스는 유명인들을 선별하여 종이로 된 책에 베테랑 기자가 쓴 매끈한 부고 기사들을 모아 책을 만들었지만, 또 다른 <죽은 이들의 책>에는 우리가 사랑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별다른 형식 없이, 특별한 꾸밈도 없이 기록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기억’ 혹은 ‘우리의 마음’이라는 책이다. 물론 그 책의 유통기간은 내가 살아있을 때까지만이란 한계가 있지만, 뭐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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