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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장의 고양이
골프장의 고양이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4.05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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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54)

미국 플로리다주에는 악어가 출몰하는 골프장이 있다. 일조량이 많고 습도가 높아 대형 파충류들이 살기 좋은 기후에다 곳곳에 해저드 삼아 조성된 늪지대까지 있으니 페어웨이를 어슬렁거리는 악어를 만나는 게 드문 일이 아닌가 보다. 또 호주 멜버른 부근에는 캥거루 떼가 몰려다녀서 골치 아파하는 골프장이 있다. 어쩌다 티샷한 골프공에 불운한 캥거루가 맞아 죽으면 그날 클럽하우스 식당에서는 캥거루 스테이크가 제공된다고 한다. 문득 대한민국 골프장 중에도 뭔가 이색적인 동물을 볼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을까 궁금해진다.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용인 에버랜드 근처에 있는 한 퍼블릭 골프장의 공작새들이다. 키우는 건지 자연적으로 날아든 건지 모르지만 그곳에서는 꼬리날개를 화려하게 펼친 수놈들도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었다. 고라니를 마주쳤던 골프장도 있긴 하지만 그건 아주 우연이었고 우리나라 골프장에서 내가 흔히 만났던 동물은 기분 나쁜 인상의 청설모 정도였다. 그런데 요즘 종종 찾는 한 골프장은 갈 때마다 매번 고양이를 만난다. 살짝 유기묘(遺棄猫)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들은 아예 몇 개 홀 티박스 부근에 자리를 잡고 사는 것 같다.
  
‘길에서 고양이와 마주치면 쓰다듬어 주어라’. 이 말은 그저 동물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다. 토론토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 조던 피터슨이 그의 책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마지막 법칙으로 소개하고 있는 문장이다.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어제의 당신하고만 비교하라’라든지, ‘쉬운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하라’라든지, 그가 제시하는 다른 법칙들은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는데 이 뜬금없는 고양이 얘기는 도대체 뭘까 싶어 나는 그 책을 집어 들고 12번째 법칙부터 읽었고, 마음을 울리는 메시지에 그 법칙을 읽고 또 읽었다.
  
피터슨 교수의 딸 미카일라는 일곱 살 무렵에 ‘소아 류마티스 관절염’ 진단을 받았다. 무려 서른일곱 군데 관절에 문제가 생겼고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통증을 견디다 못해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이 이어졌으며 딸아이는 아파하다가 실신하는 날도 있었다. 뾰족한 치료법이 없는 상황에서 조금만 참으라는 위로는 정말 무책임한 소리였다. 모름지기 부모라면 자신의 아이가 아플 때, 그리고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때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한계를 절실히 깨닫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딸의 고통을 통해 인간의 나약함과 삶의 비극성을 절감한 피터슨 교수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실제적 조언을 하나 해 준다. 바로 큰 질병 같은 인생의 위기 상황에 놓였을 때 그 문제에 압도당하지 말고 그것만 생각할 시간을 따로 정해두라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의 단위를 아주 짧게 끊어서 생각하라는 것. 악어에게 다리를 물렸는데 그 순간에 먼 미래에 대한 계획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음 주(週)가 막막하면 우선 내일만 생각하고 내일도 걱정된다면 1시간, 아니 10분, 5분만 생각하란다. 지금 눈앞에 놓인 문제를 마주할 용기만 낸다면 생각보다 많은 걸 견딜 수 있다는 피터슨 교수의 깨달음에는 그 자신의 절절한 아픔이 녹아있기에 더욱 마음이 아리다.
  
길에서 우연히 고양이를 만나는 시간은 삶의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에 대한 은유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지만, 고양이란 동물의 특성과 매력을 아는 이들은 거기서 ‘존재의 경이로움(wonder of being)’을 느끼게 되고 어디서든 고양이와의 조우(遭遇)를 즐거워한다. 고통에 허덕이는 때일수록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삶의 반짝이는 작은 보석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조던 피터슨이 말하는 인생의 12번째 법칙이다.
  
내게는 고등학교 시절의 짝꿍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40여 년을 줄기차게 만나고 있는 친구가 하나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옛날 드라마 <수사반장>에 아역으로 잠깐 출연하기도 했던 전직 연예인(?)이다. 젊은 시절엔 <아파트>를 부른 가수 윤수일을 닮았다는 소릴 제법 들을 정도로 미남이었던 이 친구는 언제나 유쾌하고 화제가 끊이지 않아, 만나면 내가 늘 에너지를 얻곤 했다. 골프도 잘 쳤는데 장타를 자랑하며 다니던 회사의 임직원 친선대회에서 우승까지 할 정도의 실력자였다(편의상 ‘김 프로’로 칭하겠다).
  
세월 앞에는 미남도 어쩔 수 없는 법이어서, 윤수일 닮았다던 곱상한 외모가 어느새 ‘로완 앳킨슨’(‘미스터 빈’을 연기했던 영국 배우)으로 변했다면서 스스로 한탄하던 우리의 김 프로가 갑자기 몸이 이상하다며 내게 다급한 전화를 걸어 온 게 3년 전쯤이었다. 말이 어눌해지고 머리가 너무너무 어지럽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한 결과 ‘급성 뇌경색’으로 진단됐고 아주 심하진 않았으나 한쪽 팔다리에 마비 증세를 보였다. 오래도록 내게 친절한 골프 과외 선생님이었던 친구가 크게 좌절하는 순간이었다.
  
신체 증상뿐 아니라 우울감까지 겹쳐 매사에 의욕을 상실하는 듯했던 김 프로는 다행히 용기를 내어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았고 증상은 서서히 개선되어 갔다. 하지만 마비가 어느 정도 풀렸을 무렵 모처럼 함께 골프를 치러 나갔다가 그는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하체가 상체의 움직임을 버텨내지 못하니 스윙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어깨가 쉬 돌지 않으니 비거리 또한 형편없어졌기 때문이다. 싱글 골퍼가 ‘백돌이’로 퇴행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동반자들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작년에 나는 김 프로를 포함한 세 명의 친구들을 모아 일부러 골프 모임 하나를 만들었다. <삼팔회>라 명명한 이 모임은 ‘팔십 살 넘어서까지 팔팔하게 팔십 대 타수를 유지하자’는 것이 ‘모토’다. 우리가 자주 가는 골프장 이름에도 ‘팔’자가 들어가는데 이 골프장 몇 개 홀에서 매번 고양이를 만난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김 프로의 고통은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취약함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함께 웃고 떠들면서 매번 조금씩 나아지는 그의 샷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은 어둠을 밝히는 촛불 같은 시간이다. 이 즐거움에 더하여 뜻밖에 고양이까지 만나다니. 다음번엔 녀석들을 꼭 쓰다듬어 주기 위해 고양이용 간식을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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