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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차, ‘라떼’는 말이야
1년차, ‘라떼’는 말이야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3.29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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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53)

모교 진단검사의학과 주임교수인 Y 선생님으로부터 오랜만에 문자가 왔다. 이분으로 말하자면, 비록 의과대학은 나보다 3년 먼저 졸업했어도 허물없이 지내는 아주 친한 친구 같은 사이다. 그도 그럴 것이 Y 선생님은 군대를 먼저 다녀와서 레지던트를 시작했기에 3년 후배인 나와 같은 해에 진단검사의학과 1년차로 발령을 받았고, 전문의가 될 때까지 4년 동안을 동고동락한 이른바 ‘의국 동기’였기 때문이다.
  
문자의 내용인즉 모교 진단검사의학과 의국의 정례 프로그램인 ‘스탭 렉처(Staff Lecture)’ 시간에 강의를 하나 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교수들도 참여하지만 주로 레지던트들을 위한 교육 시간이라고 했고 요즘은 코로나 상황이라 온라인으로 편하게 강의하면 된다고 했다. 주제는 내 맘대로 자유롭게 정하면 되고 강사료도 듬뿍 챙겨줄 테니 부디 긍정적으로 검토해 봐 달란다. 에혀, 코로나 때문에 우리 병원 일만 해도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한가롭게 남의 병원 레지던트를 위한 강의라니. 게다가 이건 다분히 Y 선생님 본인이 해야 할 숙제 하나를 내게 팔아넘기려는 심산이 엿보이지 않는가. 해서 즉답을 못한 채 고민이 시작되었다.
  
돌이켜보면 원래 우리는 Y 선생님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어서 세 명으로 1년차 생활을 시작했었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은 레지던트를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사표를 냈기에 그 뒤로는 세 명이 할 일을 나와 Y 선생님 둘이 나눠서 했다. 마침 당시엔 둘 다 총각이었기에 집에 가지 않고 의국에 기거하면서 주로 심야에 쌓인 일들을 죄다 처리하곤 했는데 힘들었지만 나름 그 생활에도 낭만적인 구석이 많았다. 의국 선배들은 이렇게 병원에 들러붙어 의국에서 노상 먹고 자고 하는 1년차들을 ‘노말 플로라(normal flora)’라고 불렀다. 병은 일으키지 않으면서 피부나 구강 혹은 소화관 등에 항상 살고 있는 세균, 즉 정상 ‘상재균(常在菌)’ 말이다.
  
‘노말 플로라’들의 숙면을 위한 안식처는 의국에 있었던 낡은 소파였다. 뒤늦게 상재균 대열에 합류한 펠로우 선생님 한 분은 소파의 자리가 모자라서 가끔 회의 탁자 위에서 잠을 자야 했다. 어느 여름날, 펠로우 선생님이 속옷 바람으로 이불도 안 덮고 탁자 위에서, 마취된 개구리의 자세로 자다가 아침 일찍 의국 문을 열고 들어오신 여교수님께 충격을 안겼던 사건은 모교 의국의 전설로 남아있다. 밤엔 먹고 자고, 낮엔 회의하고 강의 듣고 그렇게 우리에게 다목적으로 쓰이던 의국에서 어느 날 밤 Y 선생님은 중요한 발표 준비를 해야 한다면서 내게 긴히 도움을 청했다.
  
아마 임상화학 파트를 돌면서 첫 컨퍼런스 연자를 맡았을 때로 기억한다. 주제 선정에 고심하던 그는 마침내 ‘에탄올이 혈액 삼투질 농도(osmolality)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발표하겠노라 결정했다면서 자신이 직접 실험 데이터를 만들어 낼 테니 도와달라고 했다. 그날 밤 내가 했던 일은 한 시간 간격으로 밤새 Y 선생님의 피를 뽑는 일이었다. 그는 계속 소주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자기 혈액의 삼투질 농도가 얼마나 올라가는지 알고 싶어 했다. 마루타를 자청한 Y 선생님의 정성은 갸륵했고 알코올 냄새를 풍기면서도 아침에 늠름하게 발표를 마친 정신력 또한 경이로웠지만 교수님들의 반응은 싸했다. 교과서에 다 나오는 지식을 뭐하러 몸까지 축내면서 재확인하느냐는 질타성 코멘트가 이어졌을 때 야속하긴 했지만 깨달음이 있었다. 실험은 그저 재현성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 해야 한다는 것.
  
어쨌거나 Y 선생님은 시원시원한 성격에 술이 강한 편이었고 타고난 미성으로 노래를 대단히 잘했다. 의국에서 회식을 가면 대개 1년차들이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난 Y 선생님이 있어서 언제나 든든했다. 야구부 출신이었던 그는 각종 운동에도 조예가 깊어서 틈틈이 진단검사의학과 한구석에서 나와 함께 탁구를 쳤다. 빨리 내달라고 병원 여기저기서 독촉하는 온갖 검사 보고서들과 쉴새 없이 밀어닥치는 각종 발표 순서가 애송이 1년차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Y 선생님과 함께 잠깐잠깐 즐기는 망중한으로 인해 이런 부담들이 육체적, 정신적 데미지를 남기는 스트레스로까지 진화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나는 Y 선생님이 부탁했던 강의를 수락한다는 답장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사직서 하나가 내게 올라왔다. 외과 1년차 선생이 원자력병원에서 불과 일주일 남짓 근무하고서 그만두겠다며 한동안 무단결근을 한 뒤 사직서를 올린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건 자신의 인생 계획에 차질이 생겼을 것이고 또 병원에도 이런저런 피해를 준 것은 유감이다.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2021년 8월 말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작년에 내과는 6.5%(600명 중 39명), 외과는 7.3%(179명 중 13명)가 중도에 수련을 포기했다고 한다. 2021년 전체로는 숫자가 더 늘었을 것이고 그중에 1년차들도 제법 될 것이다. 수련환경, 적정수가, 해당 과의 미래비전 등등 의료계가 개선해 나가야 할 이슈들을 일깨워주는 통계지만 난 한편으로 저들의 빠른 포기 혹은 성급한 진로 수정이 당혹스럽다.
  
단풍이 곱게 든 숲속에 두 갈래의 길이 있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서 지나간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처음에 사람이 덜 간 길을 택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모든 게 달라졌다고.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딱 여기까지 말했지만 요즈음의 우리나라 인턴, 레지던트들, 아니 이 땅의 젊은이들은 잽싸게 두 갈래 길 모두를 경험하려 애쓰는 게 아닌가 싶다. 타고난 총명함에 더하여 눈부시게 발전한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제대로 받는다면 세 갈래, 네 갈래 길인들 후다닥 다녀보지 못할까.
  
재빠르게 다양한 체험을 한 뒤 최적의 길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요령 있게 멀티태스킹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떼’의 경험으로는, 그리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레지던트 1년차 때의 애환을 알뜰하게 함께 한 동료, 힘들었던 시절의 희로애락을 세월로써 차근차근 숙성시킨 벗, 그리하여 일생을 ‘지음(知音)’의 관계로 살아가는 친구. 그것은 우직하게 오직 하나의 길을 갈 때만 얻게 되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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