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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젊은 임상연구자들 위해 유한의학상 아주 중요"
[특집] "젊은 임상연구자들 위해 유한의학상 아주 중요"
  • 조준경 기자
  • 승인 2022.04.12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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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해심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
미국 알레르기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 객관적 인정받아
상금 전액 연구에 재투자···이후에도 활발히 임상연구

“유한의학상은 젊은 사람에게 주는 격려의 상으로써 아주 중요합니다”

30년전인 1992년, 서른 초반의 나이에 제25회 유한의학상 본상을 수상했던 박해심 아주대학병원 교수는 과거 유한의학상을 수상했던 당시의 소감을 의사신문 인터뷰를 통해 전했다.

당시 박 교수에게 본상 입상의 영예를 안겨준 논문은 'Clinical and immunologic evaluations of reactive dye-exposed workers'로 입상에 앞서 미국의 권위있는 알레르기학 잡지인 '저널 오브 알레지 앤드 클리니칼 임뮤놀러지'의 1991년 3월호에 게재됐다. 관련 내용은 반응성 염료제조공장에서 직업성 분진에 따른 알레르기 환자의 기전에 대해 연구를 한 것이다.

“반응성 염료에 노출된 근로자들에게 발생한 직업성 천식의 면역학적 기전을 연구했습니다. 이게 실린 잡지가 미국 알레르기 학회 공식 잡지였어요. 이 잡지가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 연구의 가치를 평가하는 점수)'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제일 높아요”

박 교수가 논문을 기고했을 당시만 해도 한국사람이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활동하며 영어로 미국 잡지에 논문을 써내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국내 의료계에서 숫자가 적었던 여성의료인의 신분으로서는 이례적인 쾌거였다.

당시 경인지역에는 반응성 염료를 생산하는 공장이 많았다. 그곳에서 일하는 공장 근로자들이 박 교수가 근무하던 세브란스 병원을 자주 찾아오며 천식 증상에 대해 직업성 알레르기인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박 교수는 최초로 근로자들에게 발생한 천식이 직업성 알레르기라는 것을 보고했고, 이후 관련 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서 발생 기전까지 밝혀낸 것이다. 연구의 성과로는 근로자들이 산재 인정을 받으며 작업환경이 개선된 것 등이 있다. 이후에도 박 교수는 관련 증상에 대한 진료지침의 후속연구를 진행하며 학업을 지속했다.

“연구주제가 굉장히 특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SCI잡지에 한국 연구자들이 영어로 논문을 게재하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특별함이 보여 유한의학상에 선정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나이도 당시에는 30대 초반으로 젊었었지요”

박 교수는 수상소감을 묻는 질문에 30년전의 답변을 환기하듯이 “연세의대 은사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1992년 4월16일자 의사신문 기사를 보면 박 교수는 유한의학상 수상 소감으로 “연세의대 내과 은사님께 감사드리며,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앞으로 이 분야 연구에 더욱 정진하겠다”고 전했다.

“저희 때 전공의를 선발할 때는 여학생이 적었습니다. 지금은 내과에 여학생 지원율이 50%에 육박하지만, 제 모교에선 한 학년에 한 명만 뽑았어요. 또 펠로우를 할때와 교수를 뽑을 때는 여학생에 대한 우려가 많았던 시기입니다. 그때 교수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대학 교수가 하고 싶었지만 여러 여건이 안돼서 국립의료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곳에 가서도 연구를 계속 했습니다”

유한의학상 본상 수상은 박 교수가 여성으로서 겪은 선입관을 실력으로 돌파한 경험이었다. 수상 당시에는 이미 레지던트 시절에 낳은 아기가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성 연구자는 결혼을 하면 활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교수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수 없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그러한 모든 환경을 극복하고 여성도 훌륭한 임상연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교수가 하고 싶어도 여러가지로 밀리고 속도 상했던 상황에서 이런 상을 받고,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인지라 굉장히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제가 그때 큰 상을 두 개나 받았어요. 대한의사협회에서 주는 광혜학술상과 유한의학상이었지요. 이러한 경력이 쌓여서 결국에는 95년도에 아주대 조교수로 발령받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박 교수는 당시 상금으로 받은 500만원을 모두 실험에 재투자했다고 한다. 연세대병원에 있을 때도 연구를 많이 했지만, 국립의료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연구 기회가 많지 않았고 교수의 신분도 아니기 때문에 연구비 마련이 어려웠다.

“만약에 연구비를 받으면 그걸 관리하는 연구행정팀이 있어야하는데 그때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니까 제가 월급을 투자해서 실험을 했습니다. 상금 500만원도 인건비와 시약비로 전부 재투자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제약회사에서 하는 상도 받았고 1억원 이상 되는 상금도 받아봤습니다. 대부분 돈은 연구에 재투자 했기 때문에 아마도 지금까지 좋은 업적을 계속 유지했다고 봅니다. 지금도 연구가 워낙 좋아서 젊은 의사들이나 학생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는 것을 즐겨요”

박 교수는 자신의 노력이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해준 유한의학상에 대해 감사의 말을 남겼다.

“이 상은 젊은 사람에게 주는 격려의 상으로써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의 대상자가 젊은 임상연구자에게 주는 거거든요. 지금은 각 대학마다 승진과 임용에 있어서 연구능력을 평가하는 비중이 커졌습니다. 연구를 위한 기초 연구도 필요하지만, 임상현장에 기반한 임상연구자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해당 역할을 수행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있어 굉장히 의미가 있고 전통이 있는 상으로 유한의학상이 계속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국제경쟁력을 가지려면 의료분야에서 연구를 잘하는 임상연구자들이 나와야해요. 앞으로도 연구자들이 연구비 걱정없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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