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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품격
병원의 품격
  • 의사신문
  • 승인 2022.03.2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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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52)

도쿄에서 전철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가메다(龜田) 종합병원>은 여러 가지 독특한 고객서비스로 인해 의료마케팅 강좌에 단골 사례로 등장하는 곳이다. 가업을 중시하는 일본 문화에 걸맞게 가메다 가문에서 무려 11대를 이어 운영해오는 1000 베드 규모의 사립병원으로 모토가 “Always say YES!”다. 이 영어 문구가 적힌 배지를 전 직원이 가슴에 달고 있는 걸 보면 고객인 환자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드리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바닷가에 인접한 입지를 살려 대부분의 병실이 탁 트인 ‘오션 뷰’를 제공하고 보호자를 위한 편의시설도 호텔급이다. 환자만 동의하면 24시간 방문객의 면회가 자유롭고 환자의 식사는 16가지 메뉴 가운데 매일 원하는 걸 선택할 수가 있다. 언뜻 믿기 어렵지만, 병원이 운영하는 바(Bar)에서는 직원뿐 아니라 환자에게까지 주류(酒類)를 제공한다. 치료과정에 큰 문제가 없는 경우라면 약간의 음주는 환자에게 활력과 휴식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안실이 병원 꼭대기인 13층에 있는 것도 특이한데 그곳이 천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설명이다.
  
싱가포르에는 외형부터 독특한 유선형인 <응텡퐁(Ng Teng Fong) 종합병원>이 있다. 우리나라 GS 건설이 시공을 맡아 2015년에 문을 연 곳으로 역시 1100 베드 규모의 대형병원이다. 평면이 마치 선풍기 날개 모양으로 설계된 이 병원은 환자 침대마다 개별 창문이 있고 창밖으로는 멋진 녹지를 조성해놓았다. 기존 병원들의 직사각형 병실 구조에는 어둡고 환기가 안 되는 구석 자리가 존재하지만, 이곳의 신기한 곡선 구조는 모든 병상에서 충분한 햇빛과 맑은 공기 그리고 인공 정원의 녹색 외부 시야를 확보하게 함으로써 환자의 심리적 안정을 도모한다.
  
‘모빌리티 파크’는 응텡퐁 병원의 특징적인 시설 가운데 하나다. 퇴원한 뒤에 어쩔 수 없이 목발이나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원활한 일상생활 복귀와 적응을 돕기 위해 만든 공원이란다. 이곳에서 환자들은 버스나 택시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고, 계단이나 경사로처럼 실생활에서 흔히 부딪히는 위험한 환경을 충분히 경험해 볼 수 있다. 아마도 환자에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에 대해 부단한 고민이 있었기에 이런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삼성그룹과 호텔 신라를 거쳐 의료계에 스카우트된 이후 다시 차례로 세브란스 병원, 이대 서울병원, 고대의료원에 몸담으며 고객서비스 혁신을 강의하는 김진영 교수로부터 나는 가메다 병원과 응텡퐁 병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7, 8년 전쯤 도봉산 어귀에 있는 수련원에서 원자력병원 의사들이 모여 ‘병원발전 세미나’를 할 때 김 교수를 특강 연자로 초청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병원도 이제부터 ‘고객 만족’이 아닌 ‘고객 경험’을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객 만족이 ‘결과 지향적’이라면 고객 경험은 ‘과정 중심적’이고 세분된 하나하나의 고객 경험이 모여 결국 고객 만족을 결정짓는다고 했다. 강의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의료계에는 ‘환자 경험 평가’ 제도가 도입되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김진영 교수의 혜안에 매료된 나는 몇 년 전에 다시 한번 그를 우리 병원에 초청했다. 이번엔 병원 전체 보직자를 대상으로 한 특강 자리였고 김 교수의 강의 제목은 <격(格)의 시대>였다. 양(量)의 시대, 질(質)의 시대를 거쳐 이제 격(格)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김 교수는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같은 제목으로 출간된 그의 책에도 똑같은 말이 나온다.
  
“양의 시대는 만들면 팔리는 시대였기에 ‘제품’이라 칭하고 ‘특장점’을 팔았다면, 질의 시대는 디자인까지 고려하여 ‘상품’이라 일컫고 ‘기술’을 팔고자 했죠. 앞으로의 격의 시대는 상품을 넘어 ‘명품’이라 하여 ‘감성’을 파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병원도 이제는 ‘격의 시대’라는 트렌드에 맞춰가야 하며 ‘온리 원 전략’이나 ‘개인화(Individualization) 전략’을 화두로 던진다고 말하는 김 교수는 ‘격의 시대’에 어울리는 병원의 사례로서 가메다 병원과 응텡퐁 병원 같은 곳을 들었다.
  
김 교수의 강의를 되새기다 보면 병원의 품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앞서가는 병원들을 부러워하다가 이내 ‘명품’이란 단어를 마주하게 되면 조금 답답해진다. 사람들이 흔히 ‘품위유지비’라고 말하는 것처럼 품격있는 병원을 만들기 위해서도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만성 적자구조의 해결이 급선무인 공공병원에서 중장기적인 계획하에 서비스 혁신에 투자할 재정 여유가 얼마나 있을까.
  
‘품격있는 병원’에 관한 근심 어린 생각의 흐름은 다행히 ‘품격있는 사람’에 이르러 다소 위안을 얻는다. 구성원들 각자가 먼저 품격을 갖추면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품격은 그리 큰 투자 비용이 들어가지 않고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매일 마주치는 동료나 고객들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배려하는 마음과 신실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누구라도 실천할 수 있는 ‘품격있는’ 일 아닌가. 
  
문득 영화 <킹스맨>의 명대사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가 떠오른다. 매너는 복수 ‘manners’로 쓰지만 단수 취급을 하기에 ‘make’의 고어도 3인칭 단수변화형을 취한다(maketh). 어쨌든 매너가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 되게, 그러니까 ‘품격있게’ 만들고 그렇게 매너를 갖춘 사람들이 모이면 결국 그들이 직장도 ‘품격있게’ 만들지 않겠는가. 스팅(Sting)의 명곡 ‘English man in New York’의 가사에도 같은 문장(Manners maketh man)이 등장한다. 이방인인데다가 정체성에도 다소 문제가 있지만, 뉴욕의 그 영국인은 품위를 지키기 위해 애처로울 정도로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를 끌어모은다. 품격있는 병원으로 가기 위해 벤치마킹 하고 싶은 에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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