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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의 의미
‘싸인’의 의미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3.15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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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51)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들은 ‘싸인’을 많이 한다. 병원 검사실이 순조롭게 잘 돌아가고 거기서 나오는 결과들이 신뢰를 주려면 꼼꼼히 챙겨야 보아야 할 지표들이 많기 때문이다. 검사의 정확도, 정밀도, 민감도, 특이도 등등을 나타내는 온갖 숫자들이 매일 기계에서 쏟아져 나오는데 이것을 제대로 분석하고 평가하지 않으면 환자가 심각한 피해를 볼 수 있기에 검사실에서 관리하는 장부들은 늘 산더미를 이룬다. 이 산더미들에 코를 처박고 싸인을 하는 일이 진검과(診檢科) 의사의 중요한 일과라서 그들의 싸인은 꽤 멋스러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해야 할 싸인이 지겹도록 많다 보니 가끔은 확인을 건성으로 하거나 혹은 싸인을 미뤘다가 한꺼번에 부랴부랴 하는 경우도 생긴다. 내용에 오류가 있음에도 그걸 발견하지 못해 ‘OK’라는 결론을 태연하게 적고는 그 아래 예의 멋들어진 싸인을 휘갈겨 놓을 때가 이따금 있다. 또 벼락치기를 할 때면, 싸인과 함께 꼭 적게 되어있는 날짜를 공휴일 여부 같은 디테일을 확인하지 않고 대충 막 써놓기도 한다. 이런 경우 매년 받는 외부 위원들의 검사실 인증심사 과정에서 꼭 들통이 난다. 어쩌면 심사원들도 자기네 병원에서 똑같은 짓을 하니까 남들 잘못을 귀신같이 집어낸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검사실은 아직 종이로 된 장부를 유지하고 거기에 펜으로 싸인하는 경우가 많지만 병원 전체로 보면 이런 식의 확인 절차는 진작부터 ‘전자서명 시스템’으로 바뀌어 있다. 병원장에게 올라오는 전자 결재문서는 하루에 수십 건이 된다. 물론 단계적으로 팀장, 부장 결재를 거쳐서 오는데 문서의 내용이나 형식에 명확한 오류가 있음에도 간혹 이들 중간관리자가 별생각 없이 덜컥 본인 서명을 마치기도 한다. 출장 보내달라면서 관련 근거 서류 첨부하는 걸 잊는다든지, 본문에 주어와 서술어가 상응하지 않는 비문(非文)이 잦다든지, 회계 숫자의 합이 맞지 않는다든지 하는 비교적 사소한 오류들이지만, 자기 이름이 공식적으로 남는 문건임에도 그런 실수를 자주 간과하는 일부 중간결재자들의 무성의는 이해하기 어렵다.
  
어쨌든 직장인들의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이런 종류의 싸인을 정식 영어로는 ‘signature’라고 한다. 그런데 영어로 ‘autograph’라 말하는 또 다른 종류의 싸인이 있다. 그건 웬만한 식당의 계산대 뒤쪽으로 주르르 붙어있는 연예인 싸인 같은 유명인사들의 서명을 의미한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일찌감치 아이돌 가수 ‘덕후’의 길에 들어섰던 우리 딸아이로 인해 한동안 그런 ‘싸인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관심을 가졌던 아이돌 그룹은 <소녀시대>였다. 자연스럽게 소녀시대 멤버들의 싸인을 받고 싶었던 딸아이는 아빠에게 진지하게 그걸 부탁했고 난 고민에 빠졌다. 국가대표 축구선수 싸인을 받아달라는 딸의 요청을 멋지게 해결했다는 흉부외과 선배가 으쓱대며 자기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축구대표팀 트레이닝 센터가 경기도 파주에 있는데 여기서 소집 훈련을 할 때 가끔 홍은동의 한 호텔 뷔페에서 단체로 식사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단다. 그 시간에 맞춰 축구공을 하나 사 들고 그곳을 찾은 선배는 축구공에 거스 히딩크 감독을 비롯해 박지성, 이영표 등등 당대 내로라하는 선수들의 싸인을 한가득 받았다고 한다. 아빠가 딸아이에게 영웅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조언 덕에 나도 안테나를 세우고 <소녀시대> 관련된 정보를 모으다 보니 핵심 멤버인 ‘윤아’가 그때 KBS 드라마에 출연하는 걸 알게 됐고 병원 직원들에게 수소문하여 모 팀장님 형제 중에 KBS PD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 PD님의 도움으로 우리 딸은 어느 날 KBS 드라마 <너는 내 운명> 촬영 현장에 초대를 받았고 주인공 ‘장새벽’ 역할로 나오는 <소녀시대> ‘윤아’로부터 직접 멋진 싸인을 받을 수 있었다. 오래 가진 않았지만 한동안 딸아이의 눈빛엔 아빠에 대한 존경이 가득했었다.
  
사춘기에 들어선 딸애는 <소녀시대>를 버리고 당시 지금의 BTS 이상으로 인기를 끌었던 남성 아이돌 그룹 <EXO>에 푹 빠졌다. 당연히 <EXO> 싸인 구해오기, <EXO> 공연 입장권 사 오기 등등이 아빠의 숙제가 되었다. 멋진 아빠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내 ‘고난의 시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연예 기획사를 운영하던 고교 동창이 어찌어찌 구해 준 <EXO> 싸인, 그것도 우리 딸아이 이름까지 정성껏 적어놓은 싸인을 전달받던 날 난 감격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솔직히 나는 연예인 싸인을 가지고 싶어 안달하는 아이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 우리 병원을 찾았던 탁구선수 출신 현정화 감독으로부터 내 탁구 라켓에 싸인을 받고 나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마치 함께 있어 나를 응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영어 잘하는 사람을 예전부터 특히 좋아하던 나는 내친김에 강경화 당시 외교부 장관의 싸인을 받고 싶어져서 외교부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어렵사리 부탁했다.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영어 공부를 계속 열심히 하는 데 격려가 될 것 같은 기분에서였다. 남아시아 어떤 나라 대사로 발령받고 이임 인사를 하러 간 자리에서 그 친구는 고맙게도 강 장관께 내 이야기를 전하며 예쁜 편지지에 싸인과 함께 격려의 메시지를 받아다 주었다. 그 편지지는 두고두고 설렘과 울림이 있는 나의 귀중품이 되었다.
  
회사에서는 일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면서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하고자 싸인을 한다. 하지만 형식에 치우치게 되면 번거롭고 비효율적인 절차에 그치고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게 아니라 책임 회피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때는 최대한 싸인의 ‘무게’를 느껴보려 애를 쓴다. 부끄럽지만 의사신문에 연재했던 에세이를 모아 최근에 수필집을 한 권 낸 이후로 내게도 그 책을 들고 와 싸인을 해달라는 분들이 생겼다. 내가 유명인이 아니기에, 단지 이름뿐 아니라 시간이 많이 흐른 뒤 들춰봐도 여운이 남을 메시지를 짧게나마 적어드린다. 그분들과의 관계를 찬찬히 돌이켜보면서 말이다. 싸인의 ‘깊이’를 느껴보려 애를 쓰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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