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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회
박달회
  • 의사신문
  • 승인 2022.03.0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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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50)

고우영 화백의 작품 <대야망>은 내 또래 남자들이 어릴 적 열광했던 무술만화다. ‘극진 가라테’의 창시자 최영의를 태권도의 절대고수로 묘사하는 등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해서 창작한 내용이 많지만 그런 사실을 안 건 한참 뒤의 일이고, 어린 시절의 나는 맨손으로 쇠뿔을 꺾던 세계 최고의 파이터 최영의에게 단박에 매료되었다. 가라테가 우리의 국기(國技) 태권도로 슬쩍 치환되어 그려진 것도 이유였지만 ‘최영의’라는 본명보다 ‘최배달’이라는 일종의 닉네임을 애용했던 주인공으로 인해 과거 이 땅의 소년들은 오늘날 이른바 ‘국뽕’이라 불리는 맹목적 애국심에 나처럼 듬뿍 취했었다.
  
그런데 최배달의 이름이 우리 민족을 뜻하는 ‘배달민족’에서 따왔다는 건 잘 알았으면서도 난 정작 ‘배달’의 정확한 어원이 무엇인지는 한참 동안 몰랐다. 요사이 대표적인 국내 배달 주문 서비스 회사가 물건이나 음식을 가져다주는 의미의 ‘배달(delivery)’을 자기네 브랜드로 사용하다 보니 어쩌면 우리 민족이 조상 대대로 신속 정확한 ‘라이더(rider)’로서의 자질이 있었나보다 하고 추측하는 젊은이들이 꽤 있는 것 같다. 본뜻은 전혀 모르고서 말이다.
  
해묵은 궁금증에 어느 날 작심하고 ‘배달’이 어떤 의미인지 찾아보았다. 실로 다양한 설(說)과 주장이 있어 혼란스러웠지만 조선 숙종 때 쓰인 <규원사화>를 레퍼런스로 하는 설명이 가장 쉽게 와닿았다. 고조선의 초대 군주 ‘단군(檀君)’의 이름에 쓰인 ‘단(檀)’은 ‘박달나무’를 뜻한다. 우리말 ‘박달’은 음운변화를 거치면서 ‘백달’이 되었다가 나중에 ‘ㄱ’이 탈락되면서 ‘배달’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거슬러 올라가면 배달의 어원은 박달나무고 박달나무는 곧 우리 한민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단군을 의미한다. 결국 배달민족이란 단군의 후예를 말하는 또 다른 이름인 셈이다.
  
1973년 4월 3일, 국립의료원 안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뷔페 ‘스칸디나비안 클럽’에 일군의 중견 의사들이 모였다. 본업인 의사로서뿐 아니라 당대의 문장가(文章家)로도 이름이 높던 이들 15인은 ‘의사 수필 동인(同人)’을 결성하고 <박달회>라 명명하였다. ‘박달나무처럼 단단하게, 또 오래오래 함께하자’란 뜻으로, 이 순우리말 이름을 제안했던 분은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의 아들이자 청량리 정신병원(당시 이름은 청량리 뇌병원) 설립자였던 고(故) 최신해 박사였다. 과거 집집마다 하나씩 있던 박달나무 재질의 빨랫방망이나 홍두깨가 얼마나 단단하고 치밀했었는지, 또 그것들이 얼마나 정감 있고 친근했었는지, 기억이 새롭다.
  
창립회원 15인 가운데 가장 오래도록 박달회 활동을 하신 피부과 전문의 유태연 선생은 ‘박달’의 정의를 ‘배달’로까지 확대하자고 하였다. 환인의 아들이자 훗날 단군의 아버지가 되는 환웅이 지상에 내려온 곳에 있던 나무 ‘신단수(神檀樹)’는 박달나무였고, 박달나무는 단군의 상징이었기에 ‘박달’이 변형된 ‘배달’은 곧 우리 민족의 별칭이 되었다. 따라서 <박달회> 회원들 또한 배달민족의 원대한 정신과 면면히 이어온 그 역사를 기억해야 할, 조금은 부담스러운 책임감이 생겼을 것 같다.
  
내가 박달회 회장님의 전화를 받은 때는 작년 여름이었다. 은사이자 모교 핵의학과 명예교수이신 정준기 회장님께서 몇몇 분들의 추천이 있었다며 나를 박달회 회원으로 초청해 주셨다. 그때만 해도 박달회를 의사들의 글쓰기 동아리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나는 2021년 말 박달회의 제48집 <허물을 벗어놓고> 출간에 처음으로 참여하고 나서야 이 모임에서 활동한다는 게 얼마나 역사적 의미가 있는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48년간 단 한 해도 빠짐없이 매년 발간해 온 수필집들의 제목과 거기에 참여한 저자들의 면면에서 탄탄한 박달의 기운과 숭고한 배달의 정신을 함께 느꼈다고나 할까.
  
그러나 새내기 회원으로 가입 허가는 받았지만 기승을 부린 코로나 탓에 선배 회원들과 얼굴을 맞대고 인사와 담소를 나눌 기회는 계속 미루어졌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박달회에서 발간한 수필집들을 하나씩 구해 보면서 이 전통 있는 의사 수필 동인의 발자취를 혼자 더듬어 나갔다.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가장 오래된 박달회 수필집은 1983년에 나온 제10집이었고 이때의 표제는 <달마다 해마다>였다. 누렇게 바랜 책장에 글씨들이 세로로 인쇄된 데다가 지금과는 다른 맞춤법이 적용되었기에 읽기가 편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점점 책에 빠져들면서 문장마다 배어 있는 의료계 대선배들의 삶의 체취를 흠뻑 맡을 수 있었다.
  
“박달회, 그리고 열돌. 우리는 달마다 만나 주변 이야기를 나누었고 글을 모아 해마다 책을 꾸몄다.” 이렇게 서문을 쓰셨던 분은 박달회 10대 회장 고(故) 윤임중 가톨릭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님이다. 열돌에서 다시 삼십팔 년이 더 지난 뒤에 들어 온 까마득한 후배에게 윤교수님은 책을 통해 소곤소곤 다정하게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신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매달 둘째 화요일 밤 우리는 모였다. 그래서 두 번째 펴낸 수필집의 이름이 ‘화요일 밤의 얼굴들’이었을 게다.”
  
박달회에 회원이 되었다는 것은 책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는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뜻이라 더욱 영광스럽다. 문득 유명 PD 출신의 작가 주철환이 그의 책 <재미있게 살다가 의미 있게 죽자>에서 아들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너 아빠가 쓴 책 끝까지 읽어본 적 없지? 아빠 죽거든 제사는 지내지 말고 기일에 아빠 책 꺼내 글 한 편씩 천천히 읽어봐.”
  
주철환은 그 말을 전하면서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산 자(데미 무어)와 죽은 자(패트릭 스웨이지)가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고 한다. 영화처럼 먼 훗날 언젠가 살아 있는 아들 옆에 죽은 자신이 앉아 흐뭇한 아빠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 상상하며 행복해하는 주철환의 기분을 나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박달회 활동은 틀림없이 내게 글쓰기에 대한 소중한 자극을 줄 것이다. 먼 훗날 언젠가 의사 후배들이 내가 쓴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중에 한 명은 지금 의대 본과 2학년인 우리 아들 녀석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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