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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와 탄식의 시절
인내와 탄식의 시절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2.1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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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48)

아침부터 세미나실 앞 병원 복도를 검은 정장 차림의 젊은이들이 가득 메우고 있어서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가만 보니 우리 병원에서 올해 근무할 인턴을 뽑는 면접전형이 한창인 시간이었다. 무슨 일인지 올해는 공공 의료기관이 인기라서 우리도 정원을 스무 명이나 초과하는 지원자들이 몰려와 면접위원들이 진땀을 흘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정장을 좍 빼입고 있기에 선남선녀가 따로 없는 것 같지만, 이들이 곧 병원에서 가장 후줄근한 행색에 항상 피곤함에 절어있는 햇병아리 의사로 변신할 걸 생각하니 애처로운 마음에 등이라도 두드려주고 싶었다.
  
직종을 불문하고 단기간 고용된 수습사원을 흔히 인턴이라 부르지만, 의사들에게 인턴은 단순히 그런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젊은 날 군대에서 잠시 보낸 시간이 평생 우려먹는 이야깃거리가 되듯이 의사들은 의료인으로 살아가는 내내 인턴 시절 1년을 추억한다. 무식했던 시절, 그래서 실수할까 두려웠던 시절, 또한 육체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던 시절이었기에 그때의 기억은 마치 어제 본 영화처럼 생생하다. 인턴을 한자(漢字)로 ‘참을 인(忍)’에 ‘탄식할 탄(嘆)’을 쓴다고 했던 한 선배의 말이 오래도록 기억되고 공감이 간다.
  
내가 인턴 생활을 막 시작할 때 바로 1년 위 선배가 전체 오리엔테이션에서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 ‘겨울에 배달 나갈 때 꼭 외투를 챙겨서 가라’. 여기서 ‘배달’이란 말은 임종을 맞이한 말기 환자를 구급차에 태워 집으로 모셔다드리는 일을 일컫는다. 환자를 물건 취급하는 비정하고 비윤리적인 은어였다. 대개는 인턴이 앰부백(Ambu bag)을 잡고 환자의 호흡을 유지하며 가다가 자택에 도착한 뒤 그것을 멈추면 환자는 사망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지금과는 달리 병원에서 돌아가시는 것 또한 일종의 ‘객사(客死)’로 간주하여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던 터라 인턴이 이런 식의 환자 이송을 맡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 선배는 어느 추운 겨울 강원도까지 환자를 이송하게 됐는데 구급차 운전사가 차를 너무 험하게 몰아 도저히 그 차로는 돌아올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환자의 사망 선언을 마친 다음 자기는 볼일이 있어 따로 가겠다고 운전사에게 둘러대고는 서둘러 대중교통을 이용하러 갔다고 한다. 그런데 병원에서 입고 온 의사 가운 차림으로 고속버스를 탈 수는 없는 일이라 가운을 벗고서 겉옷도 없이 덜덜 떨며 올라왔다는 에피소드다. 후배 인턴들에게 환자 이송 나갈 때 꼭 외투를 챙기라고 신신당부했던 걸 보면 당시 구급차 운전사분들이 얼마나 난폭운전을 했는지, 그리고 강원도의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인턴 시절 내가 처음으로 구급차를 타고 말기 환자의 자택 이송에 나섰던 건 내과를 돌던 8월, 폭염이 지독하게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환자는 서울대학교 농대에 다니던 대학생이었고 그 나이대에는 극히 드물다는 전립선암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전신에 퍼져있는 상태였다. 사망이 임박하자 보호자들은 환자를 집으로 데려가겠다 했고 인턴인 내가 동두천 자택까지 앰부백을 잡고 따라가게 되었다. 약하게나마 의식이 남아 있던 환자는 환자복 대신 원래 입고 왔던 자기 옷으로 갈아입혀 달라는 의사표시를 했다.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 노래하고 노래하고 다시 합시다.” 배재고등학교 교가로 생각되는 문구가 그 대학생이 차고 있던 허리띠 버클 테두리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힘들어하는 그의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던 나는 동두천 가는 내내 시선을 그의 버클에 고정했다. 에어컨이 잘 작동하지 않아 찜통 같았던 차 속에서 그 학생은 손에 쥐여 준 펜으로 종이에 한 마디를 적었다. ‘더워요’. 그게 세상에 남긴 그의 마지막 말이었고 나는 동두천에서 의사가 되어 처음으로 사망 선언을 했다. 훗날 배재고 교가를 우연히 듣게 됐을 때 나는 순식간에 전율에 휩싸이는 경험을 했다.
  
이제 막 인턴 생활을 시작하는 젊은 의사들이 겪게 될 한 해는 30년이 훌쩍 더 지난 나의 인턴 시절과는 당연히 많이 다를 것이다. 혈액검사 결과가 적힌 종이를 누가 빨리 찾아오는지, 엑스레이 필름을 들고 가서 얼마나 빨리 판독을 받아오는지 등등으로 인턴의 역량을 평가하던 희한한 관행은 컴퓨터가 다 바로잡은 지 오래며, 채혈이며 정맥주사 같은 기초 술기도 상당 부분 간호사 직종의 업무로 넘어갔다. 게다가 이른바 ‘전공의 특별법’이란 것이 시행되어 주당 80시간이 넘는 노동을 아예 법으로 금지했으니 인턴들의 육체적 고통은 이전보다 덜할 것이다. 그래도 처음으로 실제 환자를 대하는 부담이 크다면 다음과 같은 한 인턴의 경험을 들려주고 싶다. 
  
“인턴을 처음 시작할 때는 사실 실수에 대한 두려움과 일 자체에 대한 능력 부족으로 내 자신이 지금 생각해봐도 부끄러울 정도로 일을 제대로 못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 두 시간을 헤매도 다 하지 못했던 것을 불과 반 시간 정도면 더 깊이 있게 알아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경험의 차이일 것이다. 경험이라는 것은 시간과 비례하는 것이고 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에 와 닿는 것인가 보다.”
  
미국에서 1965년에 출간되어 1981년에 국내에서 번역된 <인턴 X>라는 책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인턴 생활을 하루도 빠짐없이 녹음해 두었다가 책으로 펴낸 익명의 실존 인물 ‘인턴 X’가 자신의 인턴 시절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기술한 위 문장에서 1990년 인턴이던 나는 위로를 받았다. ‘인내하고 탄식하는 시간이 지나가면 경험이라는 멋진 선물이 찾아오겠구나’하는 희망이 가져다주는 위로 말이다. 내일로 다가온 우리 병원 인턴 오리엔테이션의 병원장 인사말 시간에도 그 비슷한 얘길 해주고 싶다.
  
“부디 인턴 시절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인내와 탄식 가운데에서도,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깊은 성찰이 있다면 이 일 년은 여러분 의사 ‘인’생에 ‘턴(turn)’잉 포인트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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