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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사진에 대한 단상(斷想)
단체 사진에 대한 단상(斷想)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2.08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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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47)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교회 청년들 모임에서 <노찾사> 이야기를 꺼냈더니 갸우뚱거리며 누군지 잘 모르는 눈치다. 80년대 학생시위의 현장에서 비장하게 불리던 ‘민중가요’들을 일약 대중이 즐길만한 서정적인 노래로 승화시켰고 포크 가수 김광석, 안치환을 배출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모르다니. ‘꼰대’ 소리 들을까 봐 놀란 내색은 안 했지만, 그게 SBS에서 방영했던 코미디 프로그램 <웃찾사(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짝퉁’이냐고 되묻는 젊은이들에게 또 한 번 어쩔 수 없는 세대 차를 절감하며 <노찾사>의 앨범 재킷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까지 총 네 장 발간된 <노찾사> 앨범은 재킷의 디자인이 매번 조금씩 바뀌었어도 똑같은 사진 한 장을 공유하고 있다. 1집에서는 옅은 노란색으로 희미하게 음영 처리하여 형태를 쉽게 가늠할 수 없지만, 한가운데 또렷하게 실어놓은 2집을 보면 그 흑백사진이 시골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찍은 졸업사진임을 알 수 있다. 1집을 낼 때 <노찾사> 멤버들은 그 사진을 ‘익명의 대중 누구나 무수한 군중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노찾사가 될 수 있다’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한데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2집에서는 그 졸업사진 속 아이들 가운데 몇 명을 형태만 남긴 채 하얗게 탈색시켰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온갖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주로 노동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들이라든지, 민주화 항쟁에서 희생된 사람이라든지 하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이 <노찾사> 2집에 실린 곡들을 좋아하는 나 역시 노래뿐 아니라 그 앨범 재킷의 사진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하얗게 지워진 자들에 대해 생각해 볼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 책장 깊은 곳에서 잠자던, 먼지 쌓인 내 의과대학 졸업 앨범을 어렵사리 찾아내 들춰본 적이 있다. 해부학 실습을 하던 건물 앞 계단에 차례로 늘어서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20대 중반의 싱그러운 동기들 얼굴. 사진 찍던 그 순간만큼은 장차 인성과 실력을 겸비하여 존경받는 의료인이 되겠노라고 모두가 굳게 다짐하고 있었으리라. 실제로 그 다짐에 부응하여 오늘날 대한민국 의료계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친구들이 많지만, 하얗게 탈색처리만 안 했을 뿐 이런저런 이유로 유명을 달리한 친구들 또한 <노찾사> 2집 앨범만큼 보인다.
  
병원의 여느 의국(醫局)에서처럼 우리 진단검사의학과 의국에도 한쪽 벽에 역대 의국원들의 단체 사진이 주르르 걸려있다. 벽돌색 병원 본관을 배경으로, 모처럼 세탁한 의사 가운을 깔끔하게 걸치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단검사의학과 식구들. 병리사들까지 포함해서 상당히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포함된 사진들도 있다. 20년 넘게 시간이 흐르면서 내 위치는 점점 앞쪽, 중앙으로 수렴하고 있는데 그럴수록 책임의 크기 또한 점점 커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안타깝지만 역시 우리 과 단체 사진에도 다양한 연유로 일찌감치 세상과 이별한 전문의, 레지던트, 병리사들의 얼굴이 보인다. 탈색처리는 안 했어도 <노찾사> 2집 앨범의 졸업사진이 또다시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손꼽히는 명장면 중 하나가 바로 키팅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교훈을 전해주는 순간이다.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어라’로 시작하는 옛 시를 설명하던 키팅 선생님은 아이들을 선배들의 옛날 단체 사진이 진열된 공간으로 이끈다. 물론 100년도 더 된 역사를 지닌 명문 고교의 사진 속 선배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키팅 선생님은 머리모양도 같고 젊고 패기만만하며 희망에 가득 찬 눈매를 지닌 사진 속의 선배들이 지금은 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지를 학생들에게 묻는다. 그것은 그 선배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서 땅에 묻혔기 때문이라면서 마치 선배들의 유령이 나타난 양 속삭인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인생을 특별하게 살아라.”
  
아마 누구라도 무난하게 순리대로 삶을 살아왔다면 소속된 공동체에서 단체 사진을 찍을 때의 위치가 점점 앞쪽, 중앙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맨 앞 정중앙에 무사히 도달한 다음엔 <노찾사> 2집 앨범 사진처럼 하얗게 탈색되어 사라지는 일만 남겨놓게 된다. 물론 우연과 불확실성이 난무하는 우리 인생에서 앞줄 한가운데에 안착하기 한참 전 주변인으로 있을 때 거품처럼 하얗게 탈색되는 일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어쨌거나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다 하더라도 인생 단체 사진의 최종 버전은 키팅 선생님이 보여 준 미국 최고의 명문 고교 웰튼 아카데미의 자랑스러운 선배들 사진이다. 모두가 사라지는 것 말이다!
  
‘카르페 디엠’을 직역하면 ‘시간을 잡아라(sieze the day)’는 뜻이다. 인생의 유한함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해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제시한 이 대안은 얼핏 멋지게 들리지만 조금 추상적이고 모호한 면이 있는 듯하다. 그렇기에 난 존재의 사라짐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차라리 ‘시간’보다 ‘사람’을 잡자고 말하고 싶다. 사람을 잡는다는 것. 달리 말한다면 ‘사람을 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은 이해와 배려심이며 더 발전한 기교는 ‘역지사지’의 습관이다. 저마다 큰 포부를 지닌 채 단정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지만, 이내 흰 거품처럼 탈색되는 친구들이 하나둘 나오고, 마침내 한 세기가 채 못되어 등장인물 모두가 사라지는 단체 사진. 그 허전함을 견디게 해 주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서로가 꼭 잡아주는 손의 온기 아니겠는가.
  
일제 강점기 의열단의 활동을 묘사한 영화 <아나키스트>(2000)를 보면 주인공들이 거사를 앞두고 매번 사진관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장동건, 정준호, 김상중 등등 가뜩이나 잘생긴 주인공들이 최고의 단장을 하고서 사진을 찍는 이유는 단 하나,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개의 인물사진이 그렇겠지만 단체 사진에서는 유한한 인생에 대한 아쉬움과 영원을 갈구하는 염원을 더욱 읽을 수 있다. 오랜만에 들어 온 레지던트 1년차를 데리고 찍게 될 올봄의 의국 단체 사진이 제법 비장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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