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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리 부인 다시 보기
퀴리 부인 다시 보기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2.01.2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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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준의 공릉역 2번 출구 (46)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용 위인전을 집필하는 사람들은 고민이 많을 듯하다. 어린 독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교훈까지 듬뿍 안기려는 목적에 한 치도 어긋남 없는 인생을 살아간 사람들 찾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반신반인의 반열에 드는 극소수의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구라도 여러 차례 삶의 그늘이 있었을 텐데 아이들 보는 책에 위인들의 그런 허물과 인간적인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옛날 내가 보고 자랐던 위인전들 역시 실화인 양 포장했지만 상당 부분 과장과 미화가 있었을 게 틀림없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정직함을 드러내는 일화는 늘 의심스러웠다. 대부분의 어린이용 위인전에는 그가 손도끼로 아버지의 벚나무를 베어냈을 때 솔직하게 자수했더니 아버지가 감동해서 용서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조금만 팩트체크를 해보면 이건 위인전 볼륨이 너무 얇다고 생각한 전기작가가 나중에 창작해서 덧붙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워싱턴 생가에는 아예 벚나무가 없었다고 한다. 미국인들 역시 이 이야기가 좀 썰렁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날 아버지가 용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워싱턴이 시퍼렇게 날 선 도끼를 손에 계속 들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잔혹동화’ 수준의 냉소적인 조크까지 만들어냈다.
  
소년 시절 기차에서 실험하다 불을 내 차장에게 따귀를 한 대 맞고 청력을 잃었다는 발명왕 에디슨의 이야기도 수상하긴 마찬가지다. 말년에 에디슨 본인은 기차에서 실수로 떨어질 뻔한 자신을 차장이 구해주다가 하필 귀를 세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다쳤노라 진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니고 그의 청력손실은 어릴 때 앓은 성홍열의 후유증이란 게 정설로 보인다. 온갖 실패와 어려운 환경을 끝내 극복한 멋진 영웅 스토리에,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는 신체적 고난까지 하나 더 극적으로 추가하려다 보니 발생한 혼선이 아닌가 싶다.
  
마하트마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 정신의 아이콘이다. 고행에 가까운 철저한 금욕 생활로 유명한 그의 대표 이미지는 깡마른 모습으로 물레를 돌리는 것이다. 위인전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삽화에서 ‘위대한 영혼’의 초월적인 아우라가 느껴진다. 그러나 간디의 행적을 상세히 기술한 책들을 조금만 더 살펴보면 영국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찬양하던 젊은 시절의 그를 발견할 수 있다. 영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자국 청년들에게 함께 전쟁에 동참하여 제국을 위해 싸우자고 열심히 모병 운동을 하는 간디의 모습 같은 건 적어도 어린이용 위인전들에서는 굳이 다루고 싶지 않은 장면인 듯하다.
  
로자먼드 파이크가 주연을 맡은 영화 <마리 퀴리>(2020)를 최근에 볼 때도 난 머릿속으로 어릴 적 위인전에서 처음 만났던 퀴리 부인의 모습을 부지런히 떠올리고 있었다. 여성 최초로 노벨상, 그것도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연거푸 거머쥔 천재 과학자. ‘방사능(radioactivity)’이란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방사선의학 분야의 선구자. 물론 이런 거대한 성취 말고도 위인전에는 폴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을 때 불시에 학교를 방문한 러시아 장학사의 질문에 러시아말로 유창하게 대답하는 어린 시절의 마리 퀴리가 등장한다. 장학사가 돌아간 뒤 담임을 부둥켜안고 펑펑 우는 그녀의 모습을 소개하며 통곡의 이유가 폴란드인으로서 모멸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마리 퀴리의 애국심을 강조하려는 심산인데 이것도 늘 진위가 의심스러웠던 대목이다.
  
다행히 영화는 찬사 일변도의 어린이용 위인전과 상당히 달랐다. 고집 세고 타협할 줄 모르며 명예욕과 공부 욕심이 많은 마리 퀴리의 성격을 솔직하게 그대로 보여주며, 남편인 피에르 퀴리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 유부남 동료 과학자 폴 랑주뱅과의 사이에 있었던 불륜 스캔들도 가감 없이 묘사한다. 비록 위인전에 그려졌던 완벽한 인간은 아니지만, 오히려 실수도 하고 까칠한 모습도 보여주는 영화 속의 마리 퀴리가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에 손상을 입을 리도 만무했고.
  
마리 퀴리는 자신이 발견한 ‘라듐(radium)’을 작은 시험관에 넣어 자나 깨나 지니고 다녔다. 어두운 곳에서도 영롱한 빛을 내는 그 원소가 자신에게 활력을 더해준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천하의 대과학자 마리 퀴리도 그땐 그렇게 방사능의 인체 영향에 대해 무지했고 결국 방사선 피폭에 의한 재생불량성 빈혈로 사망했다. 당시 만병통치약 대접을 받았던 라듐은 식수와 초콜릿, 화장품 등에 첨가되었으며 심지어 라듐을 넣었다는 콘돔까지 팔렸던 걸 보면 그때도 과학을 빙자한 사기가 횡행했었음을 알 수 있다.
  
마리 퀴리 이후 오늘날까지 방사선의학 분야에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 1898년 그녀가 발견한 라듐은 1950년대까지 암 치료에 쓰이다가 코발트나 세슘 같은 다른 동위원소에 자리를 내주었으나 최근에 다시 뼈에 전이가 있는 전립선암 치료제로 쓰이기 시작했다. 방사선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연구도 상당히 진행되었기에 100여 년 전, 시계에 라듐이 섞인 야광 페인트를 붓으로 바르다가 중병에 걸렸던 소녀들, 일명 ‘라듐 걸스’ 같은 비극은 재발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임상시험을 쉽사리 할 수 없는 이 방사선의학 분야에는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여전히 많기에 매사 단정적으로 말하는 게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마리 퀴리의 일생을 영화로 감상하면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있다. 그녀가 오로지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는 과학자였지 결코 군중의 심리를 기웃거리는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종종 방사선의학을 둘러싼 정치적 압력이나 저항을 느낄 때가 있는데. 예컨대 몇 년 전 라듐에서 생겨나는 기체인 라돈이 침대에서 검출됐을 때 우리 기관에서는 과학적 근거를 들어 지나치게 염려할 수준이 아니라고 발표했지만 소용없었다. 방사선은 선량(線量)과 무관하게 육체적 증상보다 더 강력한 정신적 증상을 초래했고 사회적 전염성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이런 사태를 잠재울 수 있도록 마리 퀴리처럼 고집스럽고 꼿꼿하며 전문성을 인정받는 새로운 위인의 출현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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