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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도회사, 그리고 대한민국 의료법인
동인도회사, 그리고 대한민국 의료법인
  • 전성훈 변호사
  • 승인 2021.12.13 2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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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45)
전성훈변호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성훈
변호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빚은 무섭다. 자본이 신분인 자본주의사회에서도 무섭지만, 과거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으로 대표되는, 고리대금업에 대한 유럽인들의 부정적 인식은, 한편으로는 빚에 대한 공포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난 수천 년간 빚이라는 경제적 책임은 매우 가혹했다. 어떤 사업에 파트너로 투자했다가 사업이 실패하면 투자자는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모든 빚을 갚아야 했다. 즉 경제적 책임은 ‘개인’책임이었고, ‘무한’책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생면부지의 남이 하는 사업에 투자하는 것은 말 그대로 도박이었다. 그래서 투자라는 것은 대부분 가족, 친지, 친구가 하는 사업에서만 이뤄졌다. 하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왜냐하면 중세까지는 큰 자본이 필요한 사업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5세기 ‘대항해시대’가 도래하자, 유럽과 세계를 잇는 원거리 해상무역이 급증했다. 원거리 해상무역사업에서 창출되는 수익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지만, 동시에 필요한 자본의 규모도 그러했다. 이 사업의 성패에 국운이 걸렸음을 직감한 각국 정부들은 앞 다투어 이를 장려했지만, 상인들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사업이 성공했을 때의 이익이 아무리 달콤하다 하더라도, 실패했을 때에 상인 개인이 져야 할 부담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1600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상인 218명이 투자하여 설립한 법인에게 ‘아프리카 희망봉을 기준으로 그 동쪽에서 벌어지는 모든 무역에 대한 독점사업권’이라는 특혜를 부여하면서, 동시에 그 투자자들에게도 ‘책임은 출자한 자본만큼으로 제한된다(유한책임)’는 전례 없는 특혜를 부여했다. 이 법인이 그 유명한 ‘영국 동인도회사’이다. 그리고 영국 정부의 이 파격적 정책에 자극받은 네덜란드 정부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 상인들은 2년 후인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라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는 세계 최초의 다국적회사로 성장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며,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회사로 역사에 남았다.

이렇게 개인책임을 자본책임으로, 무한책임을 유한책임으로 바꿔 투자자들의 위험을 없애고 회사들이 더 쉽게 사업자금을 모을 수 있도록 한 ‘유한책임법인’이라는 혁신적 제도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원래 영국의 유한책임법인은 국왕이 내려주는 인가장(charter)을 받아야 하는 일종의 특권회사 같은 성격이었으나, 미국은 독립 직후인 19세기 초 이를 확장하여 제조업이라면 모든 회사가 이런 특혜를 적용받을 수 있게 했다. 유한책임을 적용받는 회사의 범위는 점차 확대되었고, 영국은 1845년부터 모든 회사에 유한책임법인을 허용했다. 드디어 ‘주식회사’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의료계의 ‘주식회사’라면 흔히 의료법인을 떠올릴 것이다. 의업의 본질상 ‘개인 대 개인’ 형태의 서비스가 주가 되는데, 의사 개인이 의업에 동원할 수 있는 자본에는 한계가 있고, 따라서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의 형태나 규모에도 제약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의료서비스의 확대 필요성, 의료의 공공성 제고 등을 목적으로 의료법인 제도가 1973년 민법상 재단법인의 특례로서 의료법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제도가 도입된 지 50년 가까이 된 지금, 아무리 보아도 의료법인 제도는 실패한 정책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적법하게 자본을 투자받아 보다 규모 있고 다양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수익사업을 통하여 마련한 재원을 공공성 있는 의료서비스 제공에 투입하는 등 원래 의료법인 제도가 목적한 바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의료법인 제도에 대해 지적되는 문제점 중 주된 것은 ① 학교법인이나 사회복지법인과는 달리 의료법인 간 인수.합병 등을 금지함으로써 경영난에 빠진 의료기관의 자율적 갱생 방안을 마련해 놓지 않은 점, ② 부대사업과 관련하여 학교법인은 거의 제한을 받지 않지만, 의료법인은 크게 제한받고 있는 점, ③ 학교법인은 취득세나 재산세 등에서 세제 혜택을 받지만, 의료법인은 이러한 혜택이 없는 점, ④ 학교법인은 교육부장관 인가를 받으면 파산절차 없이 자발적 퇴출이 가능하지만, 의료법인은 주무관청의 설립허가 취소 또는 법원의 파산절차를 거치지 않고서는 해산이 불가능한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의료법인에는 (의료법 규정 외에도) 민법상 재단법인 관련 규정들이 적용되므로, 의료법인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관리감독을 받는다. 그렇다면 민법에 따른 국가의 ‘공통적’ 관리감독을 전제로, 의료법에는 제도의 도입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국가의 ‘개별적’ 지원 방안이 규정됨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의료법은 의료법인에 대해 민법상 재단법인보다 엄격한 관리감독만을 규정하고 있어, 오히려 의료법인에게 이중의 족쇄가 되고 있다.

위와 같은 문제점들과 형평에 맞지 않는 규제에 더해, 고질적 ‘저수가’는 의료법인을 비급여 등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경영상 위험으로 내몬다. 그리고 이는 의료서비스의 질 저하 및 지역 내 의료서비스의 공백으로 이어진다.

정부와 국회는 의료법인에 대해 별다른 육성책도, 지원책도 내놓지 않다가, 정기적으로 뜬금없이 ‘의료서비스의 경쟁력 확보’, ‘의료의 공공성 제고’를 외치면서 ‘영리병원 도입’, ‘공공의대 신설’과 같은 땜빵식 처방만을 내놓고 있다. 의료법인의 족쇄를 풀어주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의료법인이 활발하게 운영될 수 있게 한다면, 세계 최고 수준의 우리나라 의사들에게 의료서비스의 경쟁력 확보나 공공성 있는 의료서비스 제공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영리병원이나 공공의대를 굳이 왜 만들어야 할까?  과거 어떤 나라의 정부들은, 민간의 요청에 민감하게 귀 기울여 현재까지 수백 년간 지속되고 있는 혁신적 제도를 도입했다. 책 살 돈도 안 주면서 성적 안 나온다고 매질만 하는 못된 부모 같은 우리 정부에게, 혁신적 제도 도입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우리나라 의료법인 운영자들이 반복하여 읍소하는 것은, ‘제발 똑같이만 대해 달라’, ‘망하지만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너무나 ‘의사스러운’ 요청에 마음이 아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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