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주는 위안
개가 주는 위안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10.1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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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33)

무척추동물 가운데 오징어나 문어 같은 부류를 ‘두족류(頭足類)’라 일컫는데, ‘머리에 다리가 달린 동물’이라는 뜻이다. 단숨에 세계인을 사로잡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요사이 화제지만 넷플릭스를 잘 뒤지다 보면 <나의 문어 선생님(My Octopus Teacher)>이란 훌륭한 다큐멘터리도 발견할 수 있다. <미나리>가 여우조연상을 받던 2021년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차지했던 수작이다. 탐욕 가득한 인간 군상의 적나라한 모습이 낭자한 유혈과 함께 펼쳐지는 <오징어 게임>에 심기가 몹시 불편해진 분들이 있다면, 인간과 문어 사이의 따뜻한 교감을 섬세하게 묘사한 이 작품으로 위로받기를 바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근처의 바다를 잠수하던 다큐멘터리 감독의 눈에 들어온 한 마리 암컷 문어. 외계인처럼 생긴 이 생명체의 독특한 생활방식에 매료된 감독은 급기야 하루도 빠짐없이 물에 들어가 문어의 동정을 살피기에 이른다. 그의 집착은 마침내 문어의 인정과 관심으로 보상을 받아 어느 날 놀랍게도 문어가 다리를 쭉 뻗어 악수를 청하고 그의 몸에 밀착해서 마치 재롱을 부리는 듯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우울증과 불면에 시달리던 감독의 고단한 삶이 문어를 통해 위로받고 치유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자넨 아직도 사람을 믿나?”라는 <오징어 게임> 속 등장인물의 냉소를 문어가 한 방에 날리고 있는 셈이랄까. 
 
주변 환경과 도구를 이용할 줄 안다는 문어의 지능이 강아지 정도 된다고 하는 말에 우리 집 몰티즈(Maltese) ‘빙고’가 떠올랐다. 실은 우리 빙고의 경우 할 줄 아는 재주라곤 ‘앉아’와 ‘손’ 뿐이니 문어보다 조금 지능이 떨어지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긴 한다. 하지만 십 년이 넘도록 녀석이 우리 가족들과 함께하면서 한결같이 보여주었던 사랑과 애교를 생각하면 약간 처지는 지능 따위야 관계에 하등의 문제가 될 게 없다. 
 
‘개가 주인에게 보이는 애정 어린 관심으로 인해 주인은 자신의 존재감과 중요성을 확인하게 된다’라든지, ‘개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늘 친밀함을 기본자세로 신뢰감 넘치는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라든지 하는 문장들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피에르 슐츠’가 쓴 책, <개가 주는 위안>에 등장한다. 물론 동의하지만 ‘개가 주는 고난’ 또한 만만치 않음을 개 주인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료는 거들떠보지 않고 간식과 군것질만 일삼던 빙고가 언젠가 덜컥 변비가 생겨서 대변을 보지 못한 적이 있다. 욕실에 데려가 딱딱하게 항문을 틀어막고 있는 똥 덩어리를 긁어내는, 소위 ‘핑거 에네마(finger enema)’를 시행하면서 문득 건강이 나빠진 반려견 병간호로 힘들어했던 지인들 생각이 났다.
  
그 가운데 단연 압권은 원자력병원장을 지내셨던 우리 신경외과 과장님이다. 얼굴이 납작하고 주름이 많은 ‘퍼그(Pug)’를 오래 키웠는데 녀석이 나이가 들자 안타깝게도 뇌졸중에 의한 하지마비가 발생했다. 개가 중풍을 맞은 것이다. 하지마비가 오니까 대소변 보는 데 문제가 생겼다. 그 녀석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신경외과 선배는 매일 병원 출근하기 전 강아지 배를 열심히 마사지 해서 대소변을 억지로 배출시키는 일을 수개월 동안 하셨다고 한다.
  
남다른 강아지 사랑 때문일까, 그 선배가 병원장을 하실 때 우리는 서울대 수의대가 운영하는 동물병원과 MOU를 맺었다. 당시 수의대 교수님들을 통해 개들에게도 암이 많이 발생하며 암 치료에 방사선요법이 중요하게 쓰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도입한 지 오래되어 우리 병원에서 연구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구형 ‘사이버 나이프’ 같은 방사선 수술 장비가 동물 암 치료에 효과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반려동물들이 명실상부하게 가족 대우를 받으면서 그들의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훨씬 더 체계적인 연구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암에 걸린 동물의 방사선 치료법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만들어 내기 위한 목적이라면 우리 기관보다 더 적합한 파트너는 없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조금 이상한 영어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엄마들 사이에 평판이 좋고 수강생도 엄선한다고 해서 거기 다니는 애들은 자부심이 컸었다. 하지만 아이들만 잘 가르치면 될 텐데 자꾸 부모들까지 괴롭히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어 팝송 노랫말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숙제로 집에 가서 부모님들께 들려드린 뒤 영어로 그 감상문을 받아오라는 식이다. 어느 날은 ‘학교 체벌’에 대한 아빠의 생각을 동영상으로 찍어오라는 황당한 숙제를 내줬다. 시간 없으니 빨리 얘기하라고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는 아들의 독촉에 일단 머릿속으로 영작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불쑥 빙고를 들고 와 내게 안긴다. “애들 친구들이 아빠 얼굴 보고 충격받을지 모르니까 강아지도 들고 찍으셔, 시선 분산되게.”
  
영어로 버벅대는 내 옆에 빙고가 의아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 동영상을 나는 지금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한 번씩 볼 때마다 정말 시선이 자연스레 빙고에게 집중되기에 웃음이 터진다. 그리고 단지 강아지 한 마리 안고 찍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짜증이 가라앉고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 이런 식으로 빙고가 나와 가족들에게 즐거운 추억거리를 제공해 주었던 적이 참 많이 있기에 가끔 녀석이 사고를 치더라도 모두 용서가 된다. 어쩌다 야단을 맞으면 잠깐 의기소침해지는 듯하다가도 금방 꼬리를 치고 혀로 핥으며 애정을 표시하는 순진무구함. 세상 어디에 이처럼 자기 자신보다 주인을 더 사랑하는 생명체가 또 있겠는가.
  
<나의 문어 선생님>의 주인공 문어는 천적의 습격을 받는 등 숱한 어려움을 겪지만 위기를 지혜롭게 넘기고 자신을 지켜보는 다큐 감독과의 관계 또한 잘 이어가다가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자연의 섭리대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빙고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녀석이 우리에게 주었던 조건 없는 사랑과, 녀석 때문에 위안이 되었던 많은 순간들을 생각하면 이별은 매우 슬프겠지만 그렇기에 함께 하는 오늘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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