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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동행’은 아닐지라도
‘행복한 동행’은 아닐지라도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9.1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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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30)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흔히 ‘MBA’라고 부르는 ‘경영학석사’ 과정은 대개 직장인들이 자기 업무와 관련하여 좀 더 체계적인 학습의 필요성을 느낄 때 고려하게 된다. 아무래도 나이 들어 시작하는 공부라 가정이 있는 사람들은 결혼생활에 미치는 리스크를 웬만큼 감수하면서 취득하는 학위 같기도 하다. MBA의 뜻을 풀이하는 사람들 중에 그게 일단 ‘얼떨결에 결혼했다(Married By Accident)’라는 의미라고 운을 떼면서 동시에 ‘결혼은 했어도 자유로운 영혼(Married But Available)’임을 강조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결혼 파괴 협회(Marriage Breaking Association)’의 회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생기게 한다.
  

나는 우리 병원에 입사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2000년대 초반, 당시 원장님으로부터 MBA 과정을 공부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앞으로는 의사들도 경영을 일찍부터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는 원장님의 지론에야 당연히 동의했지만, 그때 아직 어렸던 우리 집 쌍둥이들 돌보는 일을 전부 직장 다니는 아내에게만 맡겨놓을 수 없는 노릇이라 고민이 좀 됐다. 하지만 나중에 뭔가 병원의 주요 보직을 맡기려는 원장님의 ‘빅픽쳐’와 관계없이 내 전공인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 역할에도 MBA 공부가 큰 도움이 되리라는 걸 알았기에 마침내 ‘결혼생활에 미치는 리스크’를 무릅쓰기로 했다.
  
5학기 동안 야간 MBA 과정을 다니면서 평소 생소했던 재무관리, 인사관리, 마케팅 등등 경영학의 기본과목들을 열심히 배웠다. 물론 시험 볼 때만 달달 외웠던 내용들이라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신기하게도 ‘협상’ 과목에서 배웠던 것들만큼은 지금까지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아마 이전 정부에서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했던 교수님이 다양한 사례를 들려주고 희한한 실습 과제들을 많이 던져주셨던 덕분이리라.
  
학생들은 몇 개 조로 나뉘어 각각 특정 국가의 외교관 역할을 맡은 다음 수업시간에 모의협상을 벌이는 일이 빈번했다. 나는 비자면제협정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으려는 미국 정부 관리에 ‘빙의’하여 개도국 대표로 나온 상대방 학생들에게 갑질 비슷한 언사를 남발하기도 했다. ‘가격 협상’을 배운 직후의 팀별 숙제는 이태원에 가서 양복을 맞추거나 서울 외곽 골프숍에 가서 중고채를 사면서 실제로 가게 사장님들과 가격 협상을 벌인 내용을 적나라하게 정리해서 제출하는 것이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각종 협상 전략들을 현장에서 써먹어 보고 그 실효성을 확인하라는 의도였다. 이렇게 온몸으로 얻게 된 지식들이었으니 쉽게 잊힐 리 있겠는가.
  
인생의 모든 일들이 알고 보면 다 ‘협상’이라고 협상 전문가들은 곧잘 말하지만, 어쨌든 병원장으로서 내가 최근 몇 년간 참여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협상은 ‘노사협상’이다. 처음엔 옛날 협상 과목에서 배운 지식들이 그나마 머리에 좀 남아 있다는 걸 위안삼아 호기롭게 맞닥뜨렸으나 협상이 진행될수록 이건 학교에서의 짧은 실습과 어설픈 이론으로 덤빌 수 있는 자리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 자리에서 이뤄지는 의사결정들이 곧바로 수많은 직원들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게 신속한 판단을 어렵게 한다. 특히 ‘윈-윈’ 보다는 ‘제로 썸’에 가까운 이슈들이 많기에 직종 간 형평성을 생각해야 하고 기관의 재정상태도 들여다보아야 하며, 공공기관인 우리의 경우 정부의 가이드라인도 무시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제약이 있다.
  
그동안 우리 병원 노사협상은 매년 자율적 타결이 어려워 막판에 꼭 지방노동위원회의 중재안을 받는 단계까지 가곤 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어서 노사 간 큰 차이를 보이는 임금인상안을 비롯해 비정규직 문제나 임금피크제 같은 난제들을 들고서 문래동 지방노동위원회를 방문해야만 했고 기어이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한 노사협상을 벌였다. 정해진 시간 내에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누구도 원치 않는 파업 상황이 도래하기에 피를 말리는 밤샘 협상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동이 터왔다. 6월부터 시작한 노사협상의 마지막 순간. 전날 오전 11시에 시작해서 노사가 잠정합의안에 서명을 한 시각은 조정만료 25분을 남긴 9월 2일 아침 6시35분이었다.
  
언젠가부터 퇴근길 차속에서 즐겨 듣는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이 있다. 김현주씨가 진행하는 <행복한 동행>. 1977년생 젊은 배우 김현주가 아니라, 1964년생 탤런트 김현주로, 나와 세대가 비슷해서 그런지 주로 예전의 한국 가요를 많이 틀어준다. 살짝 저음인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거의 매일 듣다보니 나도 한번 사연을 보내봐야지 하다가 얼마 전 마침내 해바라기의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를’이란 노래를 신청하고야 말았다. 설마 설마 했는데 그날 밤 DJ 김현주씨가 낭랑한 목소리로 방송 중에 이렇게 말한다. “원자력병원 병원장님이 신청곡을 보내주셨네요. 코로나 환자 돌보랴, 원래 보던 암환자 치료하랴 정신없이 바쁜 의료진들과 함께 듣고 싶다고. 다들 힘내자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그날 이후 몇몇 병원 직원들로부터 뜻밖의 노래 선물 잘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운전하다 들었다는 행정직원도 있었고, 라디오 들으며 밤에 중랑천을 산책하다 들었다는 간호사도 있었다. 의외로 그 프로그램을 듣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몰래 써놓은 연애편지를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이 잠시 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으로서 서로의 연대감 같은 걸 소소하게나마 북돋워 준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그램 제목인 ‘행복한 동행’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얼핏 보면 노사협상은 대립이고 갈등이며, 노동자 입장에서 더 나아가면 ‘투쟁’일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길게 봤을 때 그 모두가 다 ‘동행’을 위한 몸짓 아니겠는가. 세상에는 ‘행복한 동행’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쾌할 수도 있고 불편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화가 날 것만 같은 동행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병원 노사가 ‘동행’이란 사실만은 함께 명심했으면 좋겠다. 서로를 부축하면서라도 아직 함께 가야 할 길이 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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