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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는 물에 손 집어넣기
끓는 물에 손 집어넣기
  • 전성훈 변호사
  • 승인 2021.08.31 1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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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33)
전 성 훈 변 호 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시련’이라는 단어는 자주 쓰이는 말은 아니다. 거기에 ‘재판’이 붙으면 더 그렇다. 하지만 ‘시련재판’이라는 단어는 중세에는 꽤 자주 쓰이는 말이었고, 게다가 사람들을 매우 흥분시키는 말이었다.

시련재판(trial by ordeal)은 죄를 지었다고 의심되는 사람에게 시련(=육체적 고통)을 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종교적 재판이다. 피고인은 시련재판을 거부할 수는 있었지만, 거부하면 세속적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많은 피고인들은 자백할 때까지 계속 고문받게 될 세속적 재판보다는 순간적 고통을 받는 시련재판을 선택했다.

시련재판은 ‘무고한 사람이 시련을 겪게 된다면 신이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종교적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 방식으로는 양쪽에 불을 피워 만든 불의 통로를 지나가게 하는 ‘불의 시련’, 펄펄 끓는 기름에 돌, 반지 등 작은 물체를 넣고 손으로 그것을 꺼내게 하는 ‘기름의 시련’, 근육 마비를 일으키는 신경독성을 가진 칼라바르 콩의 즙(피소스티그민)을 마시게 하는 ‘독의 시련’ 등이 있었다. 멀쩡하면 ‘신이 구원하였으므로’ 무죄, 상해를 입거나 죽으면 유죄로 판단했다.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가장 많이 활용된 ‘물의 시련’은 열탕과 냉탕의 두 종류가 있었다. 먼저 끓는 물의 시련은 기름의 시련과 유사하다. 그리고 차가운 물의 시련은, 먼저 성직자가 물에 축성(祝聖)하고 피고인이 그 성수(聖水) 속으로 들어가는데, 피고인이 숨이 막혀 물 위로 떠오르면 성수가 피고인을 거부한 것으로 보아 유죄로 판단했다. 성수가 그를 받아들이면(=익사하면) 무죄로 판단했다.

여기까지 보면 시련재판의 결론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에 융통성 없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섭식의 시련’은 마른 빵을 먹고 목으로 무사히 넘기면 무죄로, 토하거나 목에 걸리면 유죄로 판단했다. 이것만 좀 이상한가? 왜냐하면 섭식의 시련은 최고위계급인 사제층이 받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런 행위들이 재판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던 시기는 분명 암흑기였다. 하지만 각 사회들이 나름의 신의 존재를 진지하게 믿던 시기에, 피지배층은 ‘신의 판단’이라는 명분을 등에 업은 종교권력과 이를 비호하는 세속권력을 제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흥거리가 부족하던 시기에 시련재판은 피지배층을 흥분시키는 도박거리이자 구경거리이기도 했다.

차츰 인지가 발달하고, 유럽의 경우 흑사병으로 전체 인구의 1/3이 사망하여 농노의 부족으로 피지배층의 몸값이 올라가자, ‘신이 이런 형태의 재판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시련재판의 불합리성이 지적되었다. 그래서 영국을 시작으로 시련재판은 ‘배심원재판’으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이후 수백 년간의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현재의 재판제도가 확립되었다.

한번 생각해 보자. 재판의 ‘결과’ 즉 생명박탈, 구금, 벌금 등이 피고인에게 시련이 되어야 하는가? 형벌의 성격상 이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재판의 ‘과정’도 피고인에게 시련이 되어야 하는가? 근대 형사법은 이를 명확히 부정한다. 게다가 재판의 ‘시작 전’인 수사단계에서라면 피고인은 시련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를 ‘무죄추정 원칙’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피의자를 검찰청 앞의 이른바 포토라인에 세워 플래시 세례를 받게 한 후 ‘피의사실을 인정하느냐’라는 반복되는 질문과 망신스러운 몸싸움을 거치게 하는 ‘공개소환’에 익숙하다. 만약 피의자가 비공개로 소환된다면, 먹잇감을 놓친 언론들은 마치 수사기관이 피의자에게 대단한 특혜라도 베푼 것처럼 호도함으로써 그 분풀이를 한다. 당연히 지켜져야 할 원칙이 지켜진 것뿐인데도 말이다.

수십 대의 카메라 앞에 선 피의자는 엄청난 중압감과 수치심을 극복하고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이 차분하고 당당한 태도를 보일 것을 요구받는다. 그렇지 않고 압도되거나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 마치 죄를 인정하는 것 같은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게 되고, 그러면 재판보다 더 무서운 여론재판의 도마 위에서 난도질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가 잘못한 것이 없다면 당당하지 못할 것이 뭐 있느냐?’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요구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 언행을 지켜보고, 기록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차분하고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라는 점에서, 끓는 물에 손을 넣어 무죄를 증명하라는 시련재판과 다르지 않다. 형사 절차는 유무죄를 가리는 절차이지 배짱을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고, 재판 ‘결과’가 아닌 재판 ‘과정’이나 ‘수사 과정’ 자체가 시련이 되어서는 안 됨에도 말이다.

법조계 일부는 이러한 공개소환과 피의사실 공표의 위헌성을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고, 최근 정부는 이러한 지적을 받아들여 원칙적으로 이를 금지하되 객관적이고 충분한 증거가 있는 등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것으로 관련 제도를 개선했다. 이제 국민의 알 권리가 보장될 필요가 있는 중요사건 등을 제외하고, 법에 근거도 없는 공개소환이나 명백한 불법행위인 피의사실 공표와 같은 불합리한 관행은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재판의 탈을 쓴 사적보복(lynch)에 지나지 않는 시련재판이 없어지는데 천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고, 이조차도 저절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관행을 지적하는 깨어있는 소수가 무관심한 다수를 오랫동안 설득해 온 결과이다. 의료계에도 특히 ‘방문확인’, ‘환수’ 등과 관련하여 불합리한 실무 관행들이 적지 않은데, 이는 협회 회원권익위원회에 접수되는 민원의 상당수가 이와 관련된 민원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법조계가 사람들의 무관심을 뚫고 오랜 문제 제기를 통해 한 가지 개선에 이른 것처럼, 의료계 역시 불합리한 관행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개선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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