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제병원’이 부럽지만
‘율제병원’이 부럽지만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6.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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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준의 공릉역 2번 출구 〈21〉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대기업 율제그룹이 설립한 율제병원은 국내 최첨단 병원 중 하나다. 특히 병원의 외관과 내부구조가 호화롭기 그지없다. ‘루버(louver)’라 불리는 좁다란 차광판을 수직으로 수천 개 유리창에 덧대어 마치 물결이 이는 느낌을 주는 건물은 근사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연상시킨다. 병원 건물 한복판에는 쾌적한 중앙정원이 있고, 외래엔 ‘호스피탈 스트리트’로 불리는 널찍한 진료공간이 있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가 펼쳐지고 있는 율제병원. 이곳이 실제로는 서울의 서부 끝자락에 새로 지어진 한 대학병원이란 사실을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부러웠다. 훌륭한 하드웨어 덕분에 환자가 편리한 것은 물론이고 여기저기에서 각종 드라마나 영화 촬영 섭외까지 들어온다니 그건 당연히 외부고객에겐 병원 홍보 효과를, 내부직원들에겐 자긍심 고취 효과를 발휘하지 않겠는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았다. 우리 병원이 드라마나 영화에 배경으로 나왔던 적이 언제였었는지를.

한참 기억을 더듬다가 2015년 무렵 황정민이 주연했던 영화 <히말라야>에서 장례식장 장면을 우리 병원에서 찍어도 좋을지 문의해왔던 일이 떠올랐다. 처음엔 긍정적으로 검토하려 했으나 그쪽에서 자꾸 ‘70년대, 80년대 분위기가 물씬 나는 낡은 장례식장’을 원한다는 말에 기분이 상했다. 오래 된 병원을 물색하다 보니까 대뜸 원자력병원이 떠올랐다는 얘기 아닌가. 마침 우리 장례식장을 신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땐데 그런 말을 들으니 부아가 치밀어 거절하기로 했다.

그 몇 년 전에 SBS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병원 마당에서 촬영하던 것도 생각이 났다. 주인공이었던 이종석과 이보영이 다쳐서 응급실을 방문하는 상황이었다. 이종석의 인기가 절정이었던 때라 어떻게 알았는지 소녀 팬들이 우르르 몰려왔었다. 하지만 응급실 장면은 방송국 세트장에서 촬영하는 걸로 바뀌었고 주인공들 대신 조연인 변호사역의 윤상현과 검사역의 이다희가 분수대 옆 벤치에서 대화 나누는 장면만 잠깐 찍었다. 어쨌거나 나는 이들이 하필 우리 병원을 찾아온 게 신기해서 제작진에게 어떻게 여길 오게 됐느냐 물었다. 병원 근처에서 드라마의 다른 장면 촬영이 있었고 거기에서 제일 가까운 병원이 원자력병원이라 그냥 별 생각 없이 왔다고 했다. 차라리 안 듣는 게 나았을 대답이었다.

1984년 광화문에서 공릉동으로 신축이전 했을 무렵의 원자력병원 건물은 최첨단이었다. 1층 로비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데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던 전국 유일의 병원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병원은 크고 작은 공사를 여러 차례 하면서 환경개선이 제법 이루어졌지만 완전히 새 땅에 새로 짓는 요즘의 신설 병원들에 비하면 하드웨어 측면에서 여전히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이곳에서의 드라마나 영화 촬영은 요원한 일 아닐까 염려됐을 즈음 아주 옛날 영화 하나가 슬며시 떠올랐다.

배우 이정재와 이미숙이 각각 남녀 주인공을 맡았던 1998년 작 <정사(情事)>. 직설적인 제목만큼이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벌이던 두 사람의 파격적인 애정행각이 화제였던 영화다. 20대인 이정재와 30대인 이미숙의 풋풋한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영화 속에서 이미숙은 아이가 있는 유부녀였고 이정재는 이미숙의 여동생과 이미 약혼한 사이였다는 게 문제였다. 불륜이 소용돌이치는 이 옛날 영화에 뜻밖에도 우리 원자력병원이 등장한다. 원자력병원 중환자실에 이미숙의 아빠가 입원했기 때문이다.

우리 병원 본관 건물에서 바로 뒤 연구동으로 가려면 건너야 하는 구름다리 같은 구조물이 있다. 약 30미터 가량 되는 이 통로가 여름에는 온실처럼 뜨겁고 겨울엔 바닥에 얼음이 얼 정도로 춥다. 지붕은 얇고 양쪽 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그렇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못마땅한 표정으로 종종걸음을 걷는다. 영화 <정사>에서는 뜻밖에 바로 이 통로의 맨 끝에서 이정재가 밖을 내다보며 조용히 애인을 기다리는 장면이 나온다. 반대편에서 천천히 이미숙이 걸어온다. 쇠로 된 격자무늬 창틀과 유리창, 그리고 바닥에 비친 창틀의 그림자가 주인공들을 더욱 애틋하게 보이도록 기하학적 원근 구도를 이룬다. 평소 볼품없다고 생각했던 통로에서 촬영한 이 장면이, 꼭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인 유리 피라미드 속에서 찍은 것 같은 영상미를 보여주었다고 말하면 너무 심한 과장일까.

‘시각차’라는 걸 극명하게 느꼈던 나는 이 경험을 당시 병원 뉴스레터에 칼럼으로 게재했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발상의 전환으로 의미를 찾고 상징성을 부여하면 누추한 통로도 언제든 궁궐의 품위를 지닐 수 있다.’ 뭐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건 것 같다. 요새도 물론 율제병원 같은 초현대식 시설이 부럽지만, 더욱 중요한 건 ‘대상’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지난 수십 년간 의료진과 암 환자들의 애잔한 스토리가 곳곳에 스민 우리 병원의 오랜 하드웨어 역시 소중해지는 거다.

임신 19주 산모가 조기양막파수로 율제병원에 입원했다. 처음 진찰한 의사는 더 이상 임신유지가 어려울 것 같다면서 환자에게 아기를 포기할 것을 권했다. 상담 내용은 레지던트를 통해 고스란히 차트에 기록됐다. 절박한 산모는 의사를 바꿔주길 간청했고 주치의가 양석형 교수로 바뀌었다. 그는 산모에게 “확률이 제로는 아니니 그 확률에 모든 걸 걸고 최선을 다해보겠다”라고 말했다. 그의 소견 또한 레지던트에 의해 차트에 기록됐다. 이어지는 산부인과 레지던트의 독백이다. “같은 날, 같은 산모. 차팅한 사람도 같은 사람 나. 그런데 교수님이 바뀌니 차팅이 몇 시간 만에 완전히 바뀌었다.” 건물에 대한 시각. 사람에 대한 시각. 그리고 환자에 대한 우리의 시각에 ‘편견’ 대신 ‘이해’와 ‘긍정’이 깃들길 바란다. 힘이 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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