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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해야만 하는 의사들
싸늘해야만 하는 의사들
  • 전성훈
  • 승인 2021.05.25 18: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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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21)

 

전 성 훈변 호 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성훈 변호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저년차 부부 사이에서의 흔한 부부싸움 장면을 하나 보자. 아내는 남편에게 며칠에 걸쳐 미묘하게 불만을 표시한다. 남편은 아내의 불만의 존재는 캐치했지만 그 내용은 캐치하지 못한다. 살얼음장 위를 걷는 것 같은 이런 상태는 뭔가에 관한 남편의 ‘삽질’로 인해 깨지고, 아내는 폭발한다. 구체적인 불만 내용은 집집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내의 클로징 멘트는 이것이다: “당신은 말야! 공감능력이 떨어져!”

  고년차 부부가 되어 각기 ‘회피술’ 내공이 쌓이면 이런 저급한 불만으로는 거의 싸우지 않게 된다. 하지만 저년차 남편들에게 그놈의 ‘공감능력’은 참으로 어려운 숙제이다. 나는 안 그렇다고 생각하는 남편들은, 일부는 복받은 것이고, 일부는 공감능력에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공감(共感) 또는 감정이입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개체가 준거 기준 내에서 경험한 바를 이해하고 느끼는 능력’이다. 인간, 영장류, 조류는 모두 대뇌에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가 있는데, 이는 특정 움직임을 ‘수행’할 때와 다른 개체의 특정 움직임을 ‘관찰’할 때 똑같이 활성화되는 신경세포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fMRI를 이용한 뇌 이미지 실험의 결과, 인간의 뇌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것과 다른 사람의 경험을 눈으로 보면서 그에게 공감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직접 경험과 공감적 경험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 뇌의 특징은, 아마도 다른 개체들의 행동이나 감정을 빨리 학습하고 모방하는 것이 생존이나 집단생활에 필요했기에 발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이런 공감능력은 인간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물은 침팬지이지만, 인간과의 공감능력이 가장 뛰어난 동물로는 개를 꼽는다. 개의 하품 습성을 연구한 결과, 개는 인간이 하품을 하면 따라 하는 습성이 있고, 모르는 사람보다 주인이 하품할 때 따라 하는 비율이 훨씬 높다. 또한 개에게 다양한 냄새를 맡게 한 후 뇌파 변화를 MRI로 측정한 결과, 개는 다른 냄새보다도 인간 냄새를 가장 우선순위로 맡는다고 한다.

  반면 인간 중에서도 뇌의 감정 관련 중추에 기능적 문제가 있어 공감능력이 극히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흔히 사이코패스라고 속칭한다. 사이코패스는 치료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질병으로 볼 수도 없고, 고착되었다고 하여 단순한 장애로 볼 수도 없다. 타고난다는 점에서는 인격에 가깝겠지만, 통상적 의미의 인격으로 용인되기도 어렵다.

  유전되는 형질이므로 어느 시대에나 전체 인구의 1~2%는 사이코패스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항상 사회에서 배척받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인간들은 서로 전쟁을 치러왔는데, 전쟁 시에는 사이코패스의 냉혹함이 결단성이나 용맹함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20세기 초에 사이코패스가 정의되기 전에도 이들 중 대부분은 범죄자로 생을 마감했지만, 상당수는 영웅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징기스 칸처럼 말이다.

  얼마 전 모 인기 여가수의 오빠인 감독 A가 암 투병 중 의사들에 대하여 쓴 글이 논란이 되었다. A는 ‘복막암 투병 중이지만, 많은 분들이 응원해 주셔서 감사하다’라고 하면서, ‘복막암 완전관해 사례도 보이고, 저도 당장 이대로 죽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데 의사들은 왜 그렇게 싸늘한지 모르겠다’, ‘의사들이 제 가슴에 못을 박는 얘기들을 면전에서 저리 편하게 하니 도대체가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는 시간들이었다’라고 토로했다.

  A의 말에 따르면 여러 의사들은 각각 ‘이 병은 낫는 병이 아니다’, ‘항암은 그냥 안 좋아지는 증상을 늦추는 것뿐이다’, ‘최근 바꾼 항암약마저 내성이 생기면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라’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A가 공개한 자신의 의무기록의 ‘설명’ 란을 보면, ‘완치 안됨, 수술 안됨’, ‘기대여명은 3~6개월 정도로 보이나 복막염 회복되지 않는다면 수일 내 사망가능한 상태임’, ‘환자의 보호자(어머니)에게 이런 상황임을 설명함’, ‘항암제로 종양이 줄어들 가능성은 약 40% 안팎이고, 항암제 효과 있는 경우 평균 4~6개월 생명 연장 효과 있음’ 등이 설명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마흔 살밖에 안 된 사람이 암 투병 중이라는데 누가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공감과는 별개로, ‘의사들이 환자의 고통에 공감을 못 한다’는 일부 불만은 어떤 면에서는 오해이고, 어떤 면에서는 예견된 결과이다.

  의사는 원하건 원하지 않건 환자와 공감하게 된다. 환자 본인과 그 가족을 제외하고는 환자의 고통과 마음에 가장 공감하는 사람은, 당연히 의사이다. 그러나 의사도 사람인지라, 치료하던 환자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의사도 고통받는다. 그래서 나쁜 결과가 예상될 때에는 의사도 본능적으로 감정이입을 피하게 되고, 환자와 거리를 두는 말을 쓰게 된다. 의사가 공감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감하고 있기에 힘들어서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오해가 ‘공감’받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또한 법원이 해석을 통해 설명의무의 범위를 확대하여 왔다는 점에서는 예견된 결과이다. 설명의무의 입법취지를 모르는 바 아니나, 의료과실이 없더라도 ‘발생 가능성이 매우 낮은 부작용까지 설명하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일부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법원의 태도는 의사들을 방어진료라는 벙커 안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게다가 ‘좋아질 겁니다. 힘내세요’라고 근거 없는 희망을 주었다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나올 멱살잡이와 민형사소송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배짱 좋은 의사가 어디 있겠는가?

  중증 환자의 진료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부수할 수밖에 없는 심적 고통을 환자 개인에게 오롯이 감수하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리고 바늘판 같은 설명의무의 준수를 요구받고 있는 의사들에게 동시에 환자의 심적 고통까지 돌볼 것을 요구하는 것도 타당치 않다. 제도적 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돌리는 것은 언제나 편하고 값싼 방법이지만, 이제는 의사의 공감능력을 문제삼기보다는 입법을 통해 설명의무의 범위를 합리적으로 정비하고 중증 환자에 대한 심리상담 등 지원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의사들을 벙커에서 나오게 하고, 동시에 진정으로 환자의 고통에 ‘공감’해 주는 방법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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