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괴담, 의료계가 회초리를 들기를
백신 괴담, 의료계가 회초리를 들기를
  • 전성훈
  • 승인 2021.05.17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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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120)
전 성 훈변 호 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성훈 변호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누구나 ‘판도라’를 알 것이다. 무책임한 처신의 대명사처럼 지칭되고 있는 이 그리스 신화 속 여성은, 실은 신 때문에 예정된 악역을 떠맡은 불운한 주인공이다.

최고신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뜻을 거역하고 인간들에게 불을 훔쳐다 주자 그 대가로 인간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헤파이스토스(대장장이 신)에게 여신처럼 아름다운 인간 여자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헤파이스토스가 판도라를 빚어내자, 다른 신들은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저마다 그녀에게 선물을 주거나 자기가 지닌 재능을 불어 넣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판도라(모든 선물을 받은 여자)’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판도라를 본 프로메테우스는, 보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뭔가 ‘의도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하지만 예쁜 여자에 정신 못 차리는 남자는 항상 있지 않은가.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홀딱 반했다. 사랑에 눈이 먼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주는 것은 무엇이든 절대 받지 말라’는 형 프로메테우스의 경고를 잊고, 그녀를 아내로 맞은 데다가, 제우스가 그들 부부에게 ‘절대 열어 보면 안 된다’라고 하면서 결혼 선물로 준 항아리까지 받았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가 판도라는 문득 제우스의 결혼 선물이 기억났다. 그녀는 항아리를 열어 보자고 에피메테우스를 졸랐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다면서 거듭 거절했다. 하지만 한 번 고개를 든 호기심은, 독사의 머리처럼, 누를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가 나가고 없는 사이에 항아리를 열었고, 거기에서 질병, 노화, 고통, 기아, 가난, 증오 등 장차 인간이 겪게 될 온갖 불행이 쏟아져 나왔다. 판도라는 얼른 뚜껑을 덮었지만, 상자에는 희망만이 남았고, 그래서 인간들은 갖가지 불행에 시달리면서도 희망만은 끝까지 간직하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굳이 판도라라는 인간을 만든 후 그녀의 손을 빌음으로써, ‘내가 준 건 맞지만, 꺼낸 건 너희 인간이잖아’라고 면피(?)를 시도한 그리스 신화의 최고신은, 한편으로는 쪼잔하고, 한편으로는 상징적이다. 그리고 호기심이 모든 불행을 만든다는 이 얘기는, 서양에서 오랜 기간 지배층들에 의해 강조되고 악용되었을 것 같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우리 속담처럼 말이다.

‘갈증과 호기심은 이길 수 없다’는 속언은 틀리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식욕, 성욕, 수면욕과 같은 ‘신체적 본능’과 대비될 만큼 강력한 ‘지적 본능’인 호기심을 다양한 형태로 충족해 왔다. 인간은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예술을 창작해 왔고, 자연의 법칙에 대한 호기심으로 과학을 탐구해 왔다.

특히 인간은 시대와 귀천을 막론하고 ‘정치와 권력’에 대한 호기심이 컸는데, 이는 나의 목숨과 재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력자들이 어떤 의사결정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면 권력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호기심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권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정한 정보를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양측의 필요성의 접점에서 자연스럽게 신문이 탄생했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신문은 기원전 1세기경 고대 로마의 ‘악타 디우르나’이다. 이는 로마 제국의 공식 일일공고문으로서, 돌이나 철에 글씨를 새겨 공공장소에 게시되었다. 주로 황제의 칙령, 재판의 결과 등을 알렸고, 점점 그 내용이 확대되어 나중에는 결혼이나 사망 소식, 각종 안내 등도 알렸다.

중국에서는 8세기 당나라에서 지방 관료들을 대상으로 여러 정보들을 정리하여 보내주었던 ‘개원잡보’가 신문의 기원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종 때부터 승정원(대통령 비서실)에서 ‘조보(朝報)’, 즉 ‘조정 소식’이라는 제목으로 조정의 결정이나 공지사항을 발행했다. 이는 1895년 ‘관보’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 현재 대한민국에까지 50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정치와 권력이 제공하는 정보를 피지배층에게 전달’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신문은, 현대에 들어와 대중으로부터 ‘대중의 의견을 정치와 권력에게 전달’하는 역할까지 요구받으면서 그 소속이 자연스럽게 민간영역으로 넘어갔다. 더 나아가 ‘대중의 의견을 형성’하는 역할까지 자임하면서, 신문은 대중과 분리되어 스스로 제4의 권력기관이 되었다.

최근 코로나 백신과 관련하여 ‘백신을 맞고 수십 명이 사망했다’, ‘화이자 백신을 맞으면 DNA가 바뀐다’, ‘AZ 백신이 화이자 백신보다 훨씬 위험하다’ 등과 같은 ‘백신 괴담’이 온라인에 횡행하고 있다. 더욱 문제는 이러한 가짜 정보들을 일부 신문사들이 온라인에서 충분한 반박 없이 게재함으로써 사회적 불안을 확대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라는 요제프 괴벨스의 말마따나, 일부 신문사들은 ‘클릭장사’를 위해 정치적 분노와 종교적 증오를 부추긴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어떤 기준으로 비교해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보다 자동차 사고로 사망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이 비행기 사고를 더 두려워하는 것은, 비행기 사고시에는 자신이 전혀 통제할 수 없지만 자동차 사고시에는 자신이 일부나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망을 일으킬 정도의 심각한 자동차 사고에서 운전자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전혀 없다. 이를 설명해 주어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비행기 사고를 더 무서워한다. 마찬가지로, 코로나 감염의 위험과 백신 부작용의 위험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진지한 고민이 된다.

백신 접종에 따르는 극히 낮은 확률의 위험조차 회피하려고 하면서 집단면역이라는 공동의 이익을 누리려고 하는 것은 사회적 무임승차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이런 무임승차 시도자들이 제시하는 나름의 이유는 예외 없이 비과학적인 것들이다. 이들을 지탄하거나 설득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몫이지만, 그에 앞서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근거 없는 백신 괴담에 대해 전문가로서 따끔한 회초리를 드는 것은 의료계의 몫이다. 국민들에게 바른 정보를 전달하고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을 방지하기 위해, 정파적 논리를 떠나 의료계만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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