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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의 '민영의 살리기' <7>
알렌의 '민영의 살리기' <7>
  • 의사신문
  • 승인 2006.10.25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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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국 쿠데타

1884년 12월 4일 저녁 7시, 서울 도심 한복판의 우정국 청사에서 우정국 개국 축하 연회가 벌어졌다. 참석자들의 면면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민씨 가문의 `황태자' 민영익, 급진 개화파의 리더 김옥균, 철종의 부마 박영효, 우정국 총판 홍영식, 청나라가 파견한 독일인 고문 묄렌도르프, 영국 공사 애스톤, 미국 공사 푸트. 정말이지 `별'들의 잔치였다. 밤 10시경 연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갑자기 창 밖에서 `불이야!' 하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민영익이 정황을 살피러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묄렌도르프가 앞뜰로 따라 나서자마자 민영익이 피를 철철 흘리면서 비틀거리며 다가오더니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민영익이 칼에 찔려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 갑신정변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첫 장면이었다. 

 민영익, 그는 누구인가

민영익, 1860년생. 그러니까 사건 당시 우리 나이로 스물다섯 살. 그러나 그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당시 조선 정계의 최고 실력자였다. 그럼 그의 정치적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는 민태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오라버니 민승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러니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였던 것이다. 특히 명성황후의 총애는 대단했다. 그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1881년 창설된 별기군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을 맡았다. 이듬해에는 여동생이 왕세자(순종)와 가례를 올렸다. 그 이듬해에는 보빙사로 미국에 건너가 체스터 아서 대통령을 접견하고 국서를 전달했으며, 귀국길에는 세계일주 여행에 나서 이집트의 피라미드까지 구경했다. 그는 한마디로 떠오르는 별이었다.

묄렌도르프는 긴급히 민영익을 자기 집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미국 북장로교의 의료선교사 알렌에게 도움을 청했다. 알렌이 당도했을 때 환자는 출혈이 심했고 빈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알렌으로서는 엄청난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중국에서 병원을 차렸지만 쓰라린 실패를 경험하고 조선에 건너온 그였다. 부채도 있었다. 조선 왕실이나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 마당에 민영익이라는 거물이 자기 앞에서 이대로 죽는다면, 정말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이건 둘도 없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의 목숨을 살리기만 한다면, 인생 역전이 가능할 수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

알렌은 곧바로 민영익의 얼굴, 목, 어깨, 등에 난 상처들에 대해 응급수술을 시작했다. 모두 27군데를 꿰맸다. 물론 수술 후에도 민영익은 여전히 의식을 잃고 있었다. 알렌은 밤새 그를 간호했다. 날이 밝자 일본인 의사의 도움을 받아 상처를 전부 붕대로 감았다. 그러고는 장기간에 걸쳐 왕진을 계속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민영익의 병세는 점차 회복되기 시작해 3개월 후 완치되었다. 이를 계기로 알렌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일반 백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조선 사람들에게 서양 의술의 우수성을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다. 이로써 갑신정변으로 인한 민영익의 부상과 알렌의 성공적인 진료는 제중원 개원의 자양분이 되었다. 



 



김상태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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