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筆禍)의 교훈
필화(筆禍)의 교훈
  •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 승인 2021.04.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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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역 2번 출구' 〈12〉
홍영준 원자력병원장

“그는 자신의 그 꼴 같지 않게 교통순경의 제복을 닮은 수위 제복을 여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여튼 세상에 남자 놈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그런 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 온 얘기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

작가 한수산이 1981년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소설 <욕망의 거리>에 등장했던 구절이다. 수위의 ‘제복’은 자연스레 ‘군대’로 이어지고 허구한 날 군대 얘기만 늘어놓는 시원찮은 일부 남자들 이야기로까지 번진다. 사실 이런 류의 군상은 요즘도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으니 뭐 특별한 얘깃거리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때가 대한민국 제12대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라는 게 문제였다. 신군부가 중심이 되어 오로지 ‘정의 사회를 구현하겠다’는 숭고한 일념으로 출범한 정권 앞에서 일개 소설가 따위가 군인을 비아냥거리다니.

한수산과 중앙일보 관계자들은 즉각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후 국내에서의 창작활동에 회의를 느낀 한수산은 절필을 선언하고 일본으로 떠나야 했다. 훗날 이때의 고문 상황을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당시 중앙일보 문화부장 정규웅은 “이 사건은 새 정부와 군사 정치의 막강한 힘을 과시해 보자는 의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라고 술회한다.

감히 한수산의 혹독한 경험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 역시 ‘필화’ 비슷한 걸 겪은 적이 있다. 아직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20세기 말, 대중들이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토론할 수 있었던 중요한 언로(言路) 하나가 ‘PC 통신’이었다. 그 효시라 할 수 있는 ‘하이텔’ 게시판에 나는 많은 글을 올렸다. 나중엔 하이텔 측에서 별도의 방을 마련해주었기에 한동안 일종의 ‘기명 칼럼니스트’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인생 경험이 일천한 30대 중반의 내가 주된 글감으로 삼았던 것은 그때그때 신문을 장식하던 시사 이슈들이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뭔가 ‘공정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분노와 울분을 토해낼 때가 많았다. 날이 서고 격정이 가득한 글을 올릴수록 사이버 공간에서의 박수 소리는 커졌고 자만해진 나는 점점 과장되는 감정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기어이 문민정부 말년 온갖 권력형 비리에 개입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을 향해 독설을 쏟아놓고야 말았다.

통일 신라 시대의 유명한 문장가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 시절 지었다는 <토황소격문>을 패러디하여 김현철을 준엄하게 꾸짖은 그 글은 당시 하이텔 이용자들에게 ‘사이다’ 같은 후련함을 선사했다. 얼마 뒤 그걸 즉시 삭제하라는 한 통의 괴전화를 받을 때까지 나는 대중들의 환호로부터 기인한 우쭐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문제의 전화는 국군보안사령부가 이름을 바꾼 국군기무사령부에서 온 것이었고 그때 난 진해 해양의학적성훈련원과 국군포항병원을 거쳐, 마지막 해를 국군서울지구병원에서 근무하라는 명령을 막 받은 군의관 신분이었다.

청와대 옆에 위치한 국군서울지구병원의 주된 기능은 그때나 지금이나 국가원수와 그 가족들을 진료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거기 근무하는 장병들은 엄격한 신원조회를 통과해야 한다. 내가 PC 통신에 올린 글이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이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 짐작된다. 지나치게 순수했거나 혹은 지나치게 순진했던 나는 글을 지우라는 상부의 지시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내 글에 틀린 데가 있으면 어디 한번 당신들이 콕 짚어보라고 항의하고 싶었다. 그렇게 글 삭제를 차일피일하는 사이 나의 서울지구병원 전입 명령은 취소되었고 어이없게도 의무사령부 산하의 징계위원회에 출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징계위원회 직후 나는 군인의 신분을 망각하고 정치 성향이 다분한 글을 공공연히 게시했다는 이유로 졸지에 백령도 근무 발령이 났다. 서슬 퍼렇던 이전 군사 정권들과 달리 명색이 문민정부였으니만큼 더 이상의 억지 혐의를 씌우긴 어려웠었나 보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나를 아끼던 국군포항병원장이 급히 서울로 달려왔고 의무사령관에게 간곡하게 선처를 호소한 끝에 난 불과 몇 주 전에 송별회를 마치고 온 포항병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포항의 동료들은 고맙게도 격하게 환영해주었고 이후 나의 마지막 군 생활 1년은 그들과 함께 ‘행복하게’ 그러나 ‘얌전하게’ 막을 내렸다.

다만 유감스럽게 나의 필화 사건에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전역 직후 전임의 근무가 확정되었던 한 대형병원에서 어느 날 행정부원장이란 분이 급히 날 불렀다. 그의 책상 위에 내가 군의관 시절 하이텔에 올렸던 글들이 프린트되어 수북이 쌓여 있는 걸 보고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직감했다. “홍 선생님, 글은 잘 쓰시네요. 그런데 우리 병원의 폴리시와는 좀 안 맞는 분인 것 같습니다.” 내 글이 주변 사람들을 선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그 병원 집행부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나는 전임의 오리엔테이션 중에 내침을 당했다.

23년 전 원자력병원은 그렇게 실의에 빠졌던 나를 흔쾌히 받아 준 곳이다. 공공기관답게 느슨하고 엉성한 구석도 많지만 직원들은 소탈하고 동료들은 성실하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향해 달려갈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곳. 나의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 될 이곳에서 가끔 산책길에 옛 필화의 교훈을 되새겨 본다. 일시적 흥분에 휩싸여 무르익지도 않은 생각을 글로 옮기지 말자. 신랄하게 누군가를 비판하고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 앞서 늘 내 자신을 먼저 돌아보자.

갈등과 분열의 글이 아니라 공감과 위로의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면야 나의 필화는 어쩌면 고난으로 위장한 선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수산도 군사정권을 용서했다고 말하는데 내가 겪은 그 정도 군대 부조리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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