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받는 ‘반사적 광영(光榮)’
친구에게 받는 ‘반사적 광영(光榮)’
  • 정준기
  • 승인 2019.10.15 14: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117.完)
정준기서울대병원 핵의학과 명예교수
정준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명예교수

“나는 1945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저명한 전원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와 같이 보내고 헤어질 때 그가 나를 껴 안았다는 말을 아니 할 수 없다. 나는 범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비치 듯, 이탈리아의 플로렌스가 아테네의 문화를 받아 빛났 듯이, 남의 광영을 힘입어 영광을 맛보는 것을 반사적 광영이라고 한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 <반사적 광영>에 있는 구절이다. ‘반사적 광영’이란 말을 흔히 쓰지는 않지만 태양 빛을 받아 밤을 훤하게 비추는 보름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뛰어난 인물과 어떤 관계가 있을 때 느끼는 으쓱한 감정 내지는 명예를 뜻한다. 요즘은 유명한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와 가까운 경우에 흔히 생긴다. 학문세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친구나 동료가 세계적 업적으로 훌륭해지고 인정을 받으면 자랑스럽고 인연도 더욱 값있게 여겨질 것이다.

심한 경쟁사회에서도 세계 1위를 하는 국산품이 몇가지 있다. 반도체나 유조선 제조 분야 같은 대기업 대표 품목도 있지만, 알게 모르게 손톱깎이, 낚싯대 등 틈새 시장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일류 제품을 만드는 중소기업도 적지 않다. 이들은 뛰어난 아이디어에 남다른 노하우를 가져 허세가 섞인 대기업 보다 견고하다고 인정받는다.

이 현상을 의학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암, 심장질환, 뇌신경 질환 같은 주요 질환을 선도하는 세계적인 의학연구소나 병원을 우리나라에서 구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대규모 인력과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같은 성공사례로 토론토대학 영상의학과의 유시준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유 선생의 세부 전공분야는 소아심장혈관 영상이다. 주로 선천성 심장병을 영상진단하는 분야로 요즘 대상 환자가 줄어들어 전공 의사는 적으나 수술로 생명을 건지고 평생의 건강이 결정되기 때문에 고도의 지식과 술기가 요구되는 분야이다.

그는 서울아산병원에 조교수로 근무할 때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소아병원(The Hospital for Sick Children)에 연수를 갔다. 당시 심장 전공 Freedom 교수를 비롯한 의료진은 그가 어느 교수 보다도 탁월한 것을 발견하고 붙잡아 그 대학 정교수로 영전하였다. 물론 미국이나 캐나다 의료계에서 선두주자로 활약하고 있는 우리나라 의사가 적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 그곳에서 전문의 과정을 거쳤고, 유 선생의 가치는 그가 국내에서 모든 교육을 받고 건너간 ‘한국산(made in Korea) 수출품’이란 사실이다. 더욱이 그의 우수성과 맹활약을 본 미국대학병원에서 우리나라 영상 의학자 10여 명을 교수로 채용하였다. 크게 보면 한만청 교수님를 위시하여 비롯한 우리 학계의 다방면에 걸친 노력과 투자의 결과이지만 직접적인 모델이 된 유 선생의 공을 무시할 수는 없다.

왜, 어떻게 성공했을까? 평범한 수준의 학생이던 그가 전문가가 되어서는 우리 동기생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이루게 된 원인과 과정을 살펴보고 싶었다. 우선 그는 평생을 특수한 한 분야에 집중하였다. 그가 보낸 전공의와 주니어 교수 시절에는 그동안 밀려있던 선천성 심질환 환자의 수술이 아주 많았다. 이 때 서울대학교병원과 심장 전공 세종병원에서 수많은 임상 예를 경험하였다. 그 후 선천성 질환 환자가 적어져 많은 전문가들이 다른 분야에 눈을 돌릴 때 그는 깊이를 더해갔다. “공부도 근본부터 한다.”는 원칙에 맞추어 군의관 시절 발생학, 병리학을 서정욱 병리 선생과 공부하고, 뜻이 맞는 동료와 영어 논문 작성법, 의학 통계 책들을 독파하였다. 지금도 어려운 태아 발생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영상 소견을 분석하는 그에게 감탄사를 연발하는 임상 의사를 자주 볼 수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는 격언에 걸맞는 충실한 내용 때문에 북미방사선학회(Radiologic Society of North America, RSNA)에서 유 선생 강의에 보통 천 여명의 청중이 몰린다. 또한, 소아심장학회, 심혈관외과학회, 태아초음파 학술대회 등 연계 분야에서 가장 인기있는 강사가 되었다.

이에 더해서 그는 꾸준히 기초연구를 직접 기획하고 수행하여 왔다. 부인까지 참여해 병아리 심장병 유발 기법 등 여러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중 획기적인 연구는 벌써 12년 전에 시작한 의학 영상을 이용한 심장의 3D printing 모형 개발이다. 단층영상에서 얻은 자료로 실제 그 환자의 심장과 거의 똑 같은 레진 모조품을 만든다. 선천성 심질환을 공부하고 미리 환자의 수술과정을 결정하고 연습할 수 있으니 얼마나 유용할까? 사람이 어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천재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현상을 가끔 본다. 우리나라 기초의학계의 태두인 윤일선 교수의 권고이다. “주위를 잘 살펴보아라. 진리는 항상 뜻을 거기에 두는 사람에게 그 발견의 기회를 줄 것이다. 항상 열(熱)과 성(誠)을 다하라.”

이 3D기법은 다른 분야 보다도 앞서 의학계에 빅뱅이 될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교육과 진료에서 너무나 많은 이용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인공 관절 대치, 치아 보철 등에서 ‘각 환자 별 맞춤 치료’는 벌써 상업화 되었고, 그는 흉부외과의사를 대상으로 HOST(Hands-on Surgical Training) 과정을 5년째 열고 있다. 여기에 인공지능(AI) 기법이 더해지면 꿈 같은 일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어떤 환자의 실제 질병 모형을 3D로 만들고 이를 대상으로 수술 과정을 다빈치 로봇에 미리 입력시킨다. 이 때 실수 한 부분은 다시 교정해 완벽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것으로 로봇이 환자에게 무인 수술을 하는 것이다. 흥분하면서 설명하는 내 주장을 듣고, 유 선생은 자기 전공이외에는 시간이 없어 그것은 다른 사람의 몫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아주 현실적으로 한계에 맞게 일을 하는 사람이다.

세계적 학술대회에서 많은 청중 앞에서 명 강의를 하고, 심장 3D printing 기법을 개발해 의학의 큰 진전을 이루고, 또한 그 수입과 회사를 모두 아동병원에 기부하고, 매년 10차례 이상 외국에서 초청 강의를 하면서 지금도 나이를 잊고 일하고 있다. 이제는 활동이 국내 의료계에서도 알려져, 그와 절친하다는 이유로 나도 같이 인정받는 반사적 광영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금아(琴兒)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명문장으로 수필을 끝내었다.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산다 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다. 이 반사적 광영이 없다면 사는 기쁨은 절반이나 감소될 것이다.”
친애하고 존경하는 학형(學兄) 유시준 선생의 계속적인 활약과 건강을 기원한다.

이번 호로 <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연재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변변치 못한 제 글을 읽고 아껴 주신 애독자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 귀중한 지면을 허락하고 ‘반사적 광영’을 주신 <의사신문>사의 후의와 도와주신 김기원 전 편집국장, 김원일 편집부 부장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이 컬럼은 서울시의사회의 월간 매거진 <서울 의사>에서 계속할 예정입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