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의 역사, 인류의 역사
낙태의 역사, 인류의 역사
  • 전성훈
  • 승인 2019.09.0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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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변호사의 친절한 법률 이야기' (50)
전 성 훈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법무법인(유한) 한별
전 성 훈 서울시의사회 법제이사 법무법인(유한) 한별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물 중에서, 인류는 재생산행위와 재생산을 분리한 유일한 동물이다.
생물학적 입장에서 보면 본말이 전도된 ‘재생산 회피’라는 행위가 인류에게 폭넓게 퍼진 이유는, 첫째 성체까지의 성장 기간이 포유류 중에서도 유난히 길어 양육 부담이 그 부모와 씨족에게(특히, 여성에게)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며, 둘째 진화에 따라 온몸을 뒤덮은 털이 없어지는 과정에서 재생산을 유도하기 위한 기제인 성감(性感)이 극도로 발달하면서 재생산 없는 재생산행위만을 즐기기를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는 재생산의 효율적인 회피를 원하고, 시도해 왔다. 그렇지만 모든 시도는 일정 비율의 실패를 동반하는 법. 이 회피행위가 항상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예기치 못한 재생산의 예정은 특히 재생산의 주체인 여성을 당혹하게 했고, 이의 해결은 절박한 과제였다. 이에 낙태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나란히 쓰여 왔다.
수렵.채집사회(=구석기시대)에서는 낙태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앞서 본 것과 같이 양육의 부담을 덜어야 할 강력한 이유가 있었기에 피임, 낙태, 영아살해가 빈번했으며, 이를 처벌할 사회 권력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은 씨족의 지지 속에 자율적으로 출산과 육아 여부를 결정했다.

이러한 상황은 농경사회(=신석기시대)에 이르자 급변한다. 정착 - 농경 - 잉여생산물 축적 - 사유재산제 성립을 거쳐 계급사회의 형성에 이르자, 모든 생산활동이 동등하게 취급되던 평등한 씨족사회는 남성 가장 중심의 부계사회로 변화되었다. 또한 유전자검사가 없던 시절, 내 사유재산을 내 자식에게 확실히 상속시키기 위해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법은 비로소 낙태를 법적 개념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유산(流産) 또는 낙태가 역사서에 최초로 언급된 것은 약 4,000년 전 도시국가 우르의 고문서라고 한다. 여기에는 한 남성이 다른 남성의 딸을 폭행해 유산시키면 그는 딸의 아버지에게 은화 20셰켈을 보상해야 하며, 가난한 남성인 경우 5셰켈을, 노예의 경우 2셰켈을 보상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에만 해도 유산 또는 낙태를 법적 개념으로 인식하기는 했으나, 형벌과 무관한 일종의 사유재산에 대한 침해로 간주했다.

약 2,000년 전에 쓰인 구약성서에는 두 남자가 싸움을 벌이다 한 여성을 쳐서 유산시키자 죄를 범한 남자는 여성의 남편이 정한 보상금을 지급하라는 내용이 있는데(출애굽기 제21장 제22절), 이는 성경에서 유산 또는 낙태를 언급한 유일한 경우라고 한다. 근현대 천주교/기독교가 낙태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생각하면 다소 의외라 할 수 있다. 이는 성경이 쓰일 당시까지도 사회는 낙태의 가벌성을 명확히 인정하지 않았음을 추정케 한다.
물론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는 내용이 담긴 약 3,200년 전의 아시리아 법전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그 이후의 그리스, 로마 시대에 낙태가 광범위하게 이뤄진 것을 보면, 낙태죄가 사회적인 지지를 받아 법률화한 사회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가 서구세계의 지배이념이 된 중세 이후로는 ‘생명은 신이 부여한다’는 관념에 기반해 낙태죄는 법률화되었고, 낙태한 여성들은 처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시대에도 신의 눈을 피해 피임, 낙태, 영아살해는 광범위하게 이뤄졌고, 그에 관한 엄청난 양의 민간요법이나 안내서가 유통되었다. 13세기의 한 교황은 사제가 되기 전 의사로 일하면서 낙태처방전을 쓰기도 했고, 14세기 스트라스부르 지역 수녀들은 ‘수도회 사제들이 수녀원이 드나든 이후 수도원 안에서 아기 시체가 자꾸 발견된다’고 불평했다.

이러한 사회상이 유럽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 반대편인 일본에서도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를 금지했으나 17세기 이후로 ‘마비키(まびき: 솎아내기)’라는 영아살해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정부의 가혹한 징세로 인해 생존을 위협받았던 백성들이 살아남기 위해 영아부터 7세 이전의 아이를 ‘신의 아이’라고 해 ‘신께 돌려보내는’ 풍습이었다. 서양의 한 선교사가 일본의 어떤 마을을 방문했는데 모든 집의 자식이 1남 1녀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난 4월,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자기낙태죄, 의사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7:2)을 선고했다. 낙태죄 규정 이후 66년 만이고, 지난 2012년의 합헌 결정(4:4) 이후 7년만이다.

여성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했다는 ‘업무상승낙낙태’ 등의 죄명으로 기소된 산부인과 의사의 헌법소원심판청구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먼저 ①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는 것은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그 입법‘목적’이 정당하고, 이를 위해 적합한 ‘수단’이라고 전제하였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② 모자보건법에 규정된 낙태 정당화 사유에 해당하지 않으면 일률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입법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정도를 넘어서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어 ‘최소침해’ 원칙을 갖추지 못했고, ③ 또한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공익에 대해만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해 ‘법익균형’ 원칙도 위반했으므로, 과잉금지원칙에 위반해 자기낙태죄 조항은 위헌이라고 판시했다.

나아가 자기낙태죄 조항이 위헌이라면, 임신한 여성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의사를 처벌하는 의사낙태죄 조항도 같은 이유에서 위헌이라고 판시했다.
보건복지부는 작년 8월 낙태수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보고 낙태수술을 한 의사에게 1개월 자격정지 행정처분을 내리는 내용의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을 공포해서 의료계로부터 ‘현실을 무시한 탁상행정’이라는 강한 반발을 받았지만, 위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 이를 사실상 철회했다.

법은 사회구성원들의 합의(consensus)의 반영이므로 그에 따라 추가되고, 개정되고, 폐지된다. 타인의 인터넷 사이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도용하는 행위를 새로이 처벌하고, 음주운전 처벌을 강화하고, 혼인빙자간음죄를 폐지하는 것이 그 예이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 역시 우리 사회의 합의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례이다.

‘법은 사회를 반보 늦게 따라간다’라는 법언이 있다. 올해초 국회를 통과하여 다음달 시행을 앞두고 있는 ‘임세원법’과 같이, 의료관계법령이 의료현실을 반보 늦게만이라도 따라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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