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下山)의 사상(思想)
하산(下山)의 사상(思想)
  • 유형준
  • 승인 2019.08.2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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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86)
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유형준 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하산(下山)의 사상(思想)’. 이츠키 히로유키가 펴낸 에세이집의 이름이다. 이츠키 히로유키는 영어권에도 잘 알려진 일본의 작가다. 소설, 수필, 시 등을 쓰고 더러 작사도 한다. 1932년생이니 올해 만 여든 일곱 살이다. 이 에세이집은 2011년 말에 펴냈으니 그가 여든이 다 되어 쓴 책이다. 책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지위에서 밀려남으로써 일본이 하산 길에 접어든 현실을 인정하고, 안전하게 내리막길을 밟아 내려가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출간 즉시 일본 전역에 화제를 불러 일으켜 얼마 되지 않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읽히는 확고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은 한 국가의 하산에 대한 생각을 적었지만, 그는 ‘백년 인생을 사는 힌트’, ‘일흔 살 아래의 그대에게-마음이 꺾일 것 같은 날에’ 등의 책을 통해 하산의 삶을 잘 사는 각오와 즐기는 요령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알리고 있다. 예를 들면 ‘백년 인생을 사는 힌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는 장수 시대에 들어서, 더 이상 인생은 50년이 아니라 100년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람은 50세 이후에 50년을 더 살아야 한다. 그 길을 어떻게 걸을 것인가. 50대는 ‘시작’으로 긴 내리막길을 걸을 각오를 하고, 60대에 ‘다시 시작’하면서 고독을 즐기고, 70대는 ‘황금기’로 배우는 즐거움에 눈을 뜬다.” 개개인의 인생 하산에 대한 그의 생각은 ‘한때 국민이 국가에 봉사하고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는 관계였지만 현재 국가에 대한 신뢰도가 저하되고 와해 있다.’는 개인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시각은 어릴 적 직접 겪었던 체험에서 나온다. 그가 소년 시절 평양에서 맞이한 종전 상황에서였다. 라디오 방송은 “국민은 경거망동하지 않고 현지에 머무르라.” “치안은 유지된다.”고 반복했지만, 며칠 전부터 군인이나 고급 관료와 그 가족을 태운 비행기가 날아올랐고, 곧 소련군이 들어오고 약탈과 폭행이 벌어지고 화폐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암시장에서 물물 교환으로 식량을 구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소년의 마음과 뇌리에 ‘국가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인식이 명확하게 싹튼 것은 이 때였다. 그래서 그는 국가가 챙겨주는 연금을 당연히 기대하고 건강 보험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일이 불투명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세대 안의 격차를 강조하고 있다. 세대 간 갈등은 물론 있지만 같은 세대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는 점에 비중을 둔다. 같은 세대라도 체력, 건강, 작업 능력의 유무, 경제력 등에서 격차가 분명하다고 짚는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신체 조건을 냉정하게 관찰하여 운동 신경과 시력이 떨어지고, 신체 각 부분의 움직임이 완만하게 되었다고 판단했던 63세에 운전을 포기했다. 동세대간 격차를 줄여 더 안전한 하산을 하기 위해 동세대간 상호부조를 해결 방법으로 제시한다. 구체적 방법의 예로 동세대간 기부를 들고 있다. 하산 길에 힘들고 지친 동료의 배낭을 대신 들어주는 도움과 같은 게 아닌가 여긴다.

이츠키가 여든 두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마이니치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초고령 사회를 맞이한 일본에서 60세 이후의 삶에 대해 조언을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츠키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부모 형제는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나만 이렇게 오래 사는구나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50년 동안 좋아하는 글씨를 읽고 쓸 수 있는 인생은 행운 그 자체입니다. 올해로 저도 82세가 됩니다. 조금 지나치게 오래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자신에게 스스로 묻습니다. 질문에 한마디로 답한다면 단순화입니다. 즉, 단사리(斷捨離)입니다. 끊고, 버리고, 떠나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가치관은 물론 물질, 인간관계를 포함하여 삶의 모든 걸 혁명적으로 끊고 버리고 떠나 단순화하라는 겁니다. 생활의 모든 면에서 단사리입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단순화해야할지 헤매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방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젊고 한창 일할 세대의 원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짐이 된다’라고 자립을 선언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한 기개는 무언가 만들어 낼 겁니다.”

등산은 말 자체가 오름에 비중이 있다. 하지만 등산은 오르고 내려와야 마무리가 된다. 등산을 준비할 때 하산에 대한 준비도 거의 같은 수준으로 철저히 해야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더 피곤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를 때도 무리한 심폐 활동으로 피로가 오지만 이는 알맞은 휴식으로 얼마간 회복이 된다. 그러나 내려올 때의 피로는 심폐 기능 보다 하지근육의 과로 축적이 주된 원인이어서 휴식만으론 쉬이 회복이 안 된다. 특히 내려오면서 마치 브레이크 잡는 동작을 훨씬 많이 해야 하는 것도 하산시 발과 다리의 피로를 가중시킨다. 등산 전문가들은 이러한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산 요령을 제시하고 있다. 보폭 조절, 허리 중심 이동 등의 실제적 사항들이다. 이와 함께 제시되는 마음의 기술이 있다.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는 게 등산의 기술이라면 하산의 기술은 둘레의 경치를 즐기며 내려오는 거다. 열심히 오르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 단단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듯이 주변을 두루 즐기며 가는 마음도 가짐을 위한 결심과 훈련이 필요하다.

앞서 소개한 인터뷰의 한 대목을 글의 말미에 줄여 옮긴다. “‘하산의 사상’이라는 책을 내고 여러 곳에서 혼났어요. 그런 희망 없는 이야기 따위를 책으로 써내다니. 하지만 하산은 등산의 끝마무리가 아닙니다. 등산에서 하산은 좋은 일이지요. 하산 과정에서 문화가 성숙해집니다. 이것은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지요. 무적함대 스페인도, 대영 제국도, 미국도, 러시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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